재앙의 현장 나토리 해변마을…‘이산가족 찾기’ 벽보 빼곡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3월 14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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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돌려야 합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전속력으로 달아나야 합니다."

일본 미야기(宮城)현 나토리(名取) 시의 해변 마을 유리아게(門밑에水+上)를 불과 5㎞ 정도 남겨두고 택시 기사가 갑자기 차를 돌렸다. 14일 오전 11시 10분. 센다이(仙台) 남쪽 해변에 자리잡은 유리아게는 이번 대지진 때 쓰나미로 수십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마을이다. 시신 수습 작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앞서 라디오에서 "후쿠시마(福島) 관측소에서 3m 쓰나미가 관측됐다. 도착까지 15분, 해안에서 빨리 벗어나라"는 경고가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택시 운전사는 "유리아게는 쓰나미 피해로 수중도시가 됐는데 그래도 가겠느냐.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하면서도 계속 차를 해안 방향으로 몰았다. 하지만 유리아게에서 작업하던 자위대 대원들을 실은 차량들이 반대편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것을 본 운전사는 기자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U턴 했다.

"해안까지는 5km나 남았고 거리에 사람들도 많습니다. 좀 더 해안으로 갑시다." (기자)

"그럼 여기서 내려드리겠습니다. 쓰나미가 또 옵니다." (운전사)

이때까지만 해도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마을 사람들이 10여 명 모여 있는 지점에서 내렸다. 그때 라디오에 귀를 귀울이던 40대 남자가 갑자기 "쓰나미가 다시 온다. 모두 뛰어"라고 외쳤다. 분위기가 급변하더니 주위의 일본인들이 뛰기 시작했다. 어른은 아이들을 들고 뛰었다. 기자도 함께 뛰었다.

사람들은 바다 반대방향으로 뛰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외쳤다. "쓰나미가 또 옵니다. 빨리 대피하세요." 시내로 뛰는 사람들의 숫자는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때 싸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2, 3km를 뛰어 도착한 곳은 나토리 시청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기자의 팔을 잡고 "뛰어라"며 몸짓으로 말했던 이노마타 히로시(猪又浩·42) 씨는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꼭 안았던 아이들도 내려놨다. 그는 "11일 대지진 이후 처음 이곳 피난처로 대피했다"며 "대지진 때 집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도 여진 소식이 들리면 무섭다"고 말했다.

시청에는 약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대피했다. 어린이들도 많았다. 오지마 유토(大島雄途·8) 군은 "지진은 많이 겪어봐서 무섭지 않지만 쓰나미는 정말 무섭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쓰나미에 같은 학교 친구의 부모님이 죽었다"고 덧붙였다.



시청은 사람들의 피난처일 뿐 아니라 이산가족 찾기의 현장이기도 했다. 현장의 유리창에는 소식이 두절된 사람을 찾는 글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시청 직원들은 나토리 시내 100여 곳에 이르는 피난처에 피신한 사람들의 명부를 정리해 11시 반경 벽에 붙였다. 그러자 나토리 시민들은 친구나 친척이 제대로 피난했는지 명부를 보며 이름을 찾았다. 여기저기서 "아, 살아있구나"하는 안도의 목소리도 들렸다.

정오 무렵 시청 인근 공터에서는 센다이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 모임인 '미치노쿠카이(みちのく會)' 회원들이 물, 라면, 쌀, 휴지 등 생필품을 무료로 나눠줬다. 즉석에서 조리대를 만들어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들은 생필품을 나눠주며 "힘내세요"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음식과 생필품을 받아든 시민들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자원봉사자들은 자신들이 돈을 모아 마련한 물품이 동날 때까지 계속 물품 나눠주기를 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사흘, 나토리 시민들은 언제 다시 엄습할지 모르는 쓰나미 공포를 안고 생(生)과 사(死)의 경계선에서 싸우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었다.

나토리=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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