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리비아]벼랑끝 카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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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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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무혈 쿠데타… 현존 최장기 집권
20차례 암살위협 넘겨… 한국에 우호적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사진)는 현존하는 집권자 중 가장 오래 권좌에 앉아 있다. 21일로 집권 41년 173일째다. 그는 1980년대 이후 미군 폭격 등 20여 차례에 걸친 크고 작은 암살 위협에 직면하면서 많은 날을 사막의 텐트에서 기거했다.

카다피는 만 27세에 권력을 손에 넣었다. 1969년 대위였던 그는 11명의 청년장교들과 함께 무혈 쿠테타를 성공시켰다. 곧바로 혁명평의회를 구성해 스스로 의장에 올라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아랍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영국군과 미군이 철수하자 석유산업을 포함한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고 외국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1977년에는 사회주의와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하고 인민 직접민주주의 구현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 체제는 실상 의회제도와 헌법을 폐기한 독재권력이었다.

2년 뒤인 1979년부터 그는 서방과의 관계단절을 통해 아랍권의 맹주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5년 12월 로마와 빈에서 동시에 발생한 폭탄 테러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1986년 3월 미국과 영국 연합군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대규모 보복 공습을 받았고 1988년에는 270명의 희생자를 낸 팬암기 폭파사건 개입 의혹으로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됐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 자진 폐기 결정 때까지 오랜 고립기간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는 우호적이었다. 1980년 한국과 대사급 국교관계를 맺고 2006년 9월에는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를 접견했다. 당시 한국은 리비아의 핵 폐기 경험을 북한에 전수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지난해 6월 주리비아 한국대사관 직원의 추방으로 4개월간 지속된 양국의 외교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 ‘대국민 연설’ 차남 사이프가 나선 까닭
‘친서방-개혁’ 이미지로 정국 수습 노려

격화하는 반정부 시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21일(현지 시간) 대국민 연설에 나선 인물은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가 아닌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39·사진)이었다. 사이프는 아버지가 권력을 잡은 뒤(1969년) 태어났다.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영어실력이 뛰어나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쓴 경력도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리비아 친서방화의 얼굴이자 개혁개방의 희망’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대표적인 친서방파이자 개혁파로 알려졌다. 현재는 공식 직함이 없지만 지난해까지 카다피국제자선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현재 카다피 국가원수의 후계구도는 차남 사이프와 4남 무타심(37)으로 압축돼 있다. 장남 무함마드(리비아올림픽위원장)와 3남 사디(리비아축구협회장)는 정치에 뜻이 없어 일찌감치 후계구도에서 탈락했다. 사이프가 개혁적 마인드로 리비아의 보수파들과 갈등을 겪고 있는 데 반해 4남 무타심은 보수파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사이프의 강력한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군 중령 출신의 무타심은 현재 공안정보 분야를 총괄하는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고 있다.

그런데 왜 사이프가 나섰을까. 워싱턴의 중동문제전문가 데이비드 스쳉커 씨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즐기는 카다피의 성향 때문”으로 분석했지만 또 다른 전문가는 “사이프가 갖고 있는 대내외적인 좋은 이미지를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풀이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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