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금기깨고 핵탄두보유개수 사상 첫 공개
백악관 - 국무부 “핵무기공개가 국익에 더 큰 도움”
3일 미국이 핵탄두 보유 상황을 공개한 것은 냉전시절부터 지켜오던 ‘터부’를 또 하나 깬 조치로 평가된다. 물론 이날 미 국방부가 밝힌 ‘5113’이라는 핵탄두 수의 규모가 전문가 그룹이 추정해 온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미국 행정부가 기밀사항을 자진해서 공개함으로써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밝힌 ‘핵 없는 세상’의 실현을 위한 뚜렷한 의지를 보여준 셈이다. 또한 ‘핵클럽’ 5개국 중 가장 강력하게 핵프로그램을 극비에 부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도 핵 투명성을 촉구하는 명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고백’이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미 행정부 내에서는 핵탄두 공개 여부를 놓고 수개월간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고 국방부와 정보당국에서는 테러집단과 핵개발국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국가안보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며 강력 반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백악관과 국무부는 핵 활동을 공개함으로써 미국이 핵확산 방지 외에도 핵군축 분야에서 모범을 보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국익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반대의견을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발표한 핵태세검토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에서 미국의 핵무기 수와 역할을 점차 줄여나가는 국가안보 전략을 펼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그는 “미국은 안전하고 확고하며 효과적인 핵 억지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국가안보전략상 핵무기 수와 역할을 줄여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모색하고 핵무기에 사용되는 핵분열 물질을 더는 생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약의 협상에 나서겠다는 약속도 했다. 또한 NPT를 준수하는 비핵 국가가 미국을 생물무기 또는 화학무기를 사용해 공격하거나 사이버 테러를 감행한다 하더라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처음으로 담았다. 물론 북한과 이란처럼 핵무기 개발 또는 핵기술의 제3국 이전 등 핵확산에 나서고 있는 ‘무법집단(outliers)’은 예외로 했다.
미국의 적극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NPT 평가회의가 최종 결의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89개국 만장일치로 채택되는 결의안은 1975, 1985, 2000년 세 차례만 채택되고 나머지 네 번은 비핵 국가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 전문가 기고
핵군축 - 핵비확산 등
투명성 강화 ‘이란 핵 저지’ 국제사회 결집 유도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3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에서 미국이 현재 보유한 핵무기 수를 공개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이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라는 점에서 ‘임무 지향적’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이 핵을 개발한 1945년 이래 핵보유국들은 상대국이 가진 핵탄두의 수를 알 수 없어 핵 경쟁을 유발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지난해 핵무기 없는 세상 건설을 미국이 선도하겠다고 천명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올해부터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핵 군축, 핵 비확산과 핵 안보를 핵 비확산체제의 3대 목표로 설정해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기타 핵 원보유국이 동참하도록 하면서 이란이 핵개발을 자제하도록 국제사회의 압박을 결집하자는 것이다.
또 핵 비확산체제를 제대로 유지해 탈냉전시대에도 세계 질서에서의 미국의 리더십을 유지하고 나아가 미국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핵 테러 안보 불안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핵 개발 및 핵사용, 핵 확산에 대한 미국의 도덕적 부담을 해소해 나가는 데 국제사회가 동조해 주기를 호소하는 뜻도 포함돼 있다.
미국은 1990년대 초 ‘핵 제로 옵션’을 검토하면서 핵무기를 200기까지만 보유해도 핵 억지력은 유지할 수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이를 행동에 옮기겠다는 의지의 일환으로 핵탄두 수를 공개한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도 이를 수용하고 보유 핵탄두를 밝힐 것으로 본다.
한편 미국은 향후 큰 걸음으로 나아가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어떠한 지구상의 핵실험도 하지 않도록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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