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창업한 ARM은 반도체 설계 전문업체다. 반도체의 핵심설계 연구개발(R&D)을 전담하고 그 결과를 반도체
생산업체에 판매한다. 삼성전자 퀄컴 등 모바일기기용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이 ARM의 고객이다. ARM은 모든 것을 혼자 하지
않고 600여 개 파트너와 제휴하는 방식으로 인텔과 경쟁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ARM이 설계에 따라 생산해 고객사에 제공하는
‘레퍼런스 보드’. 사진 제공 ARM
《지난해 세계 반도체시장은 2008년보다 20%가량이나 줄었다.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 인텔은 매출이 약 7% 감소했지만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사실 칭찬을 받을 회사는 따로 있었다. 영국의 ARM이란 회사였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말 “반도체 전선(戰線)이 이동하고 있다”며 인텔에 맞선 ARM의 성공비결을 자세히 보도했다. 국내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ARM이란 중견기업이 수십 년간 세계 반도체업계를 지배했던 인텔의 아성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英반도체기업 ‘ARM’ 핵심기술 제공해 협력 확대, 모바일용 CPU시장서 돌풍
대만 스마트폰 제조 ‘HTC’ 자기 브랜드 과감히 포기, 구글-MS와 손잡고 대박
美인터넷기업 ‘페이스북’ 인맥자료 기업에 무상공개, 방문자 수로는 구글 넘어서
올해 초 구글이 직접 만들어 판매를 시작한 스마트폰 ‘넥서스원’은 대만의 HTC라는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만든다. 지난해 스마트폰 시장에서 HTC는 노키아, 림(RIM), 애플에 이어 세계 스마트폰 시장 4위에 올랐다. 삼성전자 모토로라 LG전자 등은 모두 HTC에 밀렸다.
지난달 말 미국의 인터넷 시장조사업체 컴피트는 주목할 만한 통계를 공개했다. 아직 상장도 안 된 미국의 인터넷기업 페이스북이 월간 방문자 수에서 세계 최대 인터넷기업 구글을 앞질렀다는 통계였다.
ARM과 HTC, 페이스북은 규모로 보면 중견기업 수준이다. 세계 정보기술(IT)업계 골리앗들과 싸우는 이들의 성공 사례는 정부의 ‘중소기업 특혜’라는 울타리에 안주하고 있는 한국 중견기업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인텔, 모바일 CPU에서 ARM에 밀리다
지금까지 반도체산업은 ‘거인들의 전쟁’이었다. 수조∼수십조 원의 설비투자를 일찍 진행해 효율적으로 반도체를 먼저 대량생산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았다. 삼성전자와 인텔 등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시장을 휩쓴 업체들이다.
이런 시장에서 ‘게임의 법칙’이 바뀌고 있다. 소형 가전제품과 휴대전화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 설계를 전문적으로 하는 ARM 때문이다. ARM의 직원은 약 1700명, 지난해 매출은 약 3억 파운드(약 5200억 원)로 한국으로 치면 중견기업이다. 직원 8만 명 이상에 매출액이 351억 달러(약 40조 원)에 이르는 인텔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작은 회사다.
고성능 컴퓨터에 사용되는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이 반도체시장의 주류였던 시기에는 인텔이 어느 기업보다 강했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포터블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 같은 모바일 전자제품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연간 컴퓨터용 CPU 시장은 약 3억 개 수준이다. 하지만 지난해 ARM의 기술을 사용한 반도체는 모두 250억 개에 이른다. ARM 계열 반도체는 휴대전화 한 대에 평균 2개 이상 쓰이며 PMP와 내비게이션 등 대부분의 모바일 기기에 사용되고 있다.
ARM의 성공비밀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직원교육, 소프트웨어 개발, 반도체 제조 등에서 600여 개 외부 파트너 업체의 힘을 이용한다. 특히 ARM은 반도체 설계만 하고 협력사가 반도체를 제조한다. 최근 스마트폰 CPU ‘스냅드래건’을 만든 퀄컴이나 ‘테그라’라는 CPU를 만든 엔비디아가 대표적이다. 애플과 삼성전자 등도 ARM 기술을 채용한 반도체를 만든다.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하는 인텔이 어느 한 곳을 이긴다고 해도 ARM 계열의 반도체를 만드는 업체가 끊임없이 나타나게 된다.
○ 대만의 작은 기업 HTC, 스마트폰 강자 되다
2007년 구글은 삼성전자 모토로라 퀄컴 T모바일 등 세계 각국의 휴대전화 제조업체 및 통신사 등과 협력해 ‘안드로이드’라는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관심은 과연 어떤 회사가 첫 ‘구글폰’을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답은 모토로라도, 삼성전자도 아니었다. HTC라는 알려지지 않은 대만 기업이 ‘G1’이라는 첫 구글폰을 내놓았다. 이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모바일 스마트폰 OS를 사용한 스마트폰도 ‘윈도폰’으로 팔았다. 올해 1월 구글이 직접 휴대전화를 만들겠다고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때 나온 ‘넥서스원’이란 휴대전화도 HTC가 만들었다.
HTC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비용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모토로라 같은 휴대전화 기업들이 ‘브랜드’에 투자해 자신들의 제품가치를 높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나서서 이름을 알리기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의 명성에 묻어가는 전략을 택했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은 노키아와 ‘블랙베리’를 만드는 캐나다의 림(RIM), ‘아이폰’을 만드는 애플에 이어 HTC가 4.6%로 세계 4위다. 삼성전자는 3.3%, 모토로라와 LG전자는 5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브랜드 마케팅 대신 제조 부문의 핵심역량에 집중한 HTC의 사업모델이 성공한 셈이다.
○ 페이스북, 정보공개로 ‘윈윈’하다
미국의 인터넷조사업체 컴피트에 따르면 1월 페이스북의 방문자는 중복 방문을 포함해 28억7282만3682명으로 구글의 27억8099만7436명보다 많았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고 순방문자는 여전히 구글이 많았지만 세계 최대 인터넷기업을 앞질렀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됐다.
페이스북은 2004년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이 만든 작은 서비스회사였고 지금도 매출액이 연간 1조 원이 안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앞으로 기업공개를 통해 주식시장에 상장되면 시가총액 기준 세계 3위 IT 기업인 구글 못지않은 거대 기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페이스북이 쉽게 방문자를 늘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사용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쉽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페이스북에서 ‘친구’로 연결돼 있으면 다른 친구들이 올린 글이나 사진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데다 세계 3억 명 이상의 사용자가 이 서비스를 쓰고 있어 사실상 거의 모든 인터넷 인구가 가입해 있다는 게 큰 자산이었다.
페이스북은 이런 사용자 관계 정보를 혼자 이용하는 대신 외부 기업에 공개했다. 게임회사와 응용프로그램 개발회사 등이 페이스북의 사용자 정보를 사용자 동의만 받으면 무료로 쓸 수 있도록 ‘페이스북 커넥트’라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 대신 수익이 생기면 페이스북과 계약에 따라 나누도록 했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에게 생산하는 가치의 상당 부분을 나눠줘 서로 ‘윈윈’하는 모델을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징가’라는 작은 게임회사는 2007년 단 여섯 명이 창업한 회사였지만 2년여 만에 하루 6000만 명이 이용하는 게임회사로 성장했다. 징가의 지난해 매출액은 2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 ARM 창업자 브라운 사장 “골리앗 기업이 모든걸 만드는 시대 끝났다” ▼ 끊임없는 신기술 경쟁 규모보다 투자속도 더 중요 인텔과 경쟁해 승리할 것
“휴대전화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뭘까요?”
지난달 말 한국을 찾은 ARM의 창업자 가운데 한 명인 튜더 브라운 사장(사진)은 본보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물었다. 그가 스스로 말한 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였다. 컴퓨터와 달리 휴대전화는 전원이 들어와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대기’에 보낸다. 그는 이런 간단한 특성이 반도체 산업을 바꾸고 있다고 했다. 스마트폰의 급속한 성장 때문이다.
그동안 반도체 업계 세계 1위는 인텔이었다. 세계 대부분의 컴퓨터가 인텔 반도체를 사용했다. 그런데 스마트폰 시장을 비롯해 애플의 ‘아이패드’와 같은 가벼운 태블릿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배터리를 적게 쓰고 열을 적게 내는 반도체를 만드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브라운 사장은 “이제 ARM의 반도체 기술을 사용하는 ARM의 파트너들이 인텔과 경쟁해 이길 수 있는 때”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컴퓨터용 반도체 시장에서는 인텔이 경쟁사가 들어올 때마다 대규모 투자와 마케팅으로 이들의 추격을 따돌렸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선 다르다. 컴퓨터 시장에서 인텔은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해 이른바 ‘윈텔’(윈도+인텔) 체제를 만들었지만 스마트폰 시장은 아직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블랙베리 등이 경쟁하는 ‘춘추전국시대’이기 때문이다.
시장조사기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인텔이 모바일 기기용으로 만든 반도체인 ‘아톰’ 프로세서는 아직 ARM 계열 제품보다 제조원가가 많이 들고 전력 소모도 크다. 하지만 인텔은 매년 수십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 기업이다. 인텔이 마음먹고 모바일용 반도체 시장에 뛰어든다면 ARM도 힘들지 않을까.
그는 “인텔은 그동안 저전력 저발열 기술보다는 성능 향상을 위해 대부분의 투자를 진행했다”며 “성능 향상에 투자해 온 과거의 유산이 수십조 원일 텐데 이를 주저 없이 포기하고 투자 방향을 바꾼다면 그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점점 많은 모바일 기기가 등장하고 요구사항도 다양해질 텐데 이를 기업 한 곳이 독점하기는 어려우리라는 전망도 내보였다. 그는 최근 구글이 내놓은 스마트폰 OS ‘안드로이드’를 예로 들었다. ARM은 애플의 주요 파트너지만 시장환경이 바뀌자 구글과도 바로 협력을 진행했다. 하지만 인텔은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형 파트너와 고려할 사항이 많아 ARM처럼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브라운 사장은 “결국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기업이 모든 걸 다 만드는 비즈니스 모델은 지속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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