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위기 원인? 불편한 현실 알면서도 외면한 탓”

  • 입력 2009년 4월 24일 03시 02분


‘실패학’ 창시자 하타무라 요타로 日도쿄대 명예교수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렸을까. 왜 아무도 몰랐을까. 누구에게나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실패는 있게 마련이지만, 이번엔 전 세계가 실패를 곱씹고 있다. 세계를 뒤흔든 경제위기를 생각하다가 일본 실패학 창시자인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68) 도쿄대 명예교수를 떠올렸다. 그는 실패했을 때의 교훈을 공유해 예방에 활용하자는 ‘실패학’의 제창자다. 요즘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22일 도쿄 간다(神田)의 창조공학연구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언론으로는 첫 인터뷰다. 실패학에 이어 위험학, 창조학, 결정학 등을 주창한 그는 말을 할 때는 항상 구체적인 데이터를 들이댔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실패를 맛보고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경제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상응한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세계 주요국들도 미국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득이 된다’는 이유 하나로 따라갔다. 중국조차 미국에 붙는 게 득이니까 따라갔다. 이를 실패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인간에게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뭔가 이상하고 위험하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선제적으로 위험을 볼 수 있지만, 아무도 불편한 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일이 터지고 난 뒤 ‘몰랐다’면서 누군가의 탓으로 돌린다. 이번에는 미국 탓을 하고 싶겠지만 그러기엔 미국이 두려우니 마치 신이 만든 큰 재앙에 전 지구가 휩쓸렸다는 듯이 표현한다. 또 ‘기(氣)에 휩쓸리는 현상’도 있었다. 사람은 주변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간다. 그 판단이 이상해도 눈치 채지 못한다. 전체를 따르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의 금융위기는 ‘100년에 한 번’이란 용어로 과장돼 관련자들의 편의에 따라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기업마다 해고 근로자가 적지 않고, 실적도 악화되고 있다.

“지금 상황이 어렵지 않다는 게 아니다. 100년에 한 번의 재앙이란 듯 난리칠 정도는 아닌 것 같다는 얘기다. 아무리 둘러봐도 1929년 대공황 때처럼 실업률이 30%에 이르는 상황은 아니다. 하다못해 1974년 오일쇼크 당시의 인플레나 물자 사재기 소동과 비교해도 사회는 훨씬 안정돼 있다. 대기업들이 수천억 엔의 적자를 앞 다퉈 발표하는 것에서도 그간 누적된 문제를 이 기회에 털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가령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

“일본의 경기침체 원인은 과잉 품질, 과잉 기능, 과잉 생산 탓이다. 소비자들의 소비 행태는 이 같은 과잉을 배제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가령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화려하게 성장했지만 그 성공 속에는 이미 수요 감소라는 실패요소가 내포돼 있었다. 선진국 자동차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인데 자동차 한 대의 평균 사용연수는 1997년 9.3년이던 것이 2007년에는 11.7년으로 늘었다. 품질이 좋아졌기 때문이지만 포화상태는 악화된다. 미국인들도 필요해서 사는 게 아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문제와 똑같이 자동차도 살 수 있으니 산거다. 돈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사면 그만이다. 지금 나타나는 현상이 그것이다. 비전문가인 나만 해도 제너럴모터스(GM)가 곧 망할 것이라는 얘기를 4, 5년 전부터 들었다. 언제나 일이 터지고 나서야 이런저런 원인 분석이 나오지만 맥락과 시나리오를 보려고만 했다면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일이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끝없는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과잉 요소를 줄여야 한다. 기업이라면 생산량을 어느 정도 축소하고 수요가 남아 있는 개발도상국을 조준해 세계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경영 방침을 대폭 전환할 때는 앞에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까를 상정하고 업계 전체의 흐름에 따르기보다는 기업 스스로가 판단해서 행동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 기업이 배워야 할 상대는 한국 기업이다. 일본 기업이 선진국 시장을 대상으로 고기능 고기술로 치닫고 있을 때 한국 기업은 개발도상국 소비자들의 수요를 읽고 중저가 상품을 개발해 시장을 확보해 나갔다. 시장의 요구, 소비자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해 틈새를 노린 거다. 한국이 외환위기의 고통을 겪으며 구조조정을 한 경험 덕이었다고 본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물건을 생산해 소비자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일본 기업에 ‘삼성을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려면….

“대단한 비결이란 게 있겠는가. 단, 성공 가능성을 높이고 실패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전에 가능한 한 스스로 생각해두면 매우 강력한 힘이 된다. 개인이건 조직이건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지 말고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는 2001년부터 일본 과학기술진흥기구가 주관하는 ‘실패지식 데이터베이스(DB) 정비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2002년 결성된 실패학회도 운영하고 있다. 모두 실패를 숨기지 말고 드러내서 극복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일본에서 실패담은 훌륭한 지식이 된다.

“2000년 내 강연을 들은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曾根弘文) 당시 문부과학상이 ‘지금의 일본에 필요한 건 당신의 사고방식’이라며 예산을 대줄 테니 DB 작업을 해달라고 했다. 싫다고 도망치다가 결국은 맡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국가가 이런 일을 하는 나라는 일본뿐일 것이다.”

2001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5년간 10억 엔을 썼다. 최근에는 연간 4000만 엔 정도로 줄었다. DB에는 일본에서 일어난 기술적 실패사례 1200건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인터넷(shippai.jst.go.jp)으로 접속 가능하며 영어판도 있다. 연간 액세스는 500만 페이지뷰, 영어판도 50만 페이지뷰에 이른다.

―최근 ‘회복력’이란 책을 냈다.

“경제위기에 지친 사람들에게 아무리 좌절해도 자살하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사람은 실패를 하면 에너지가 없어진다. 결과가 중대할수록 자신의 에너지로는 대항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에너지가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잠을 자건, 맛있는 것을 먹건 기분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변명거리를 찾고 남의 탓으로 돌릴 필요도 있다. 자기 보신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괴로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도망쳐 에너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자신 속에는 회복할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다만 실패했을 때 주변에서 도움을 받는 사람은 평소 성실하게 노력을 계속해온 사람이란 건 강조하고 싶다.”

―실패학적 사고방식을 도입한 기업들의 제품 불량률이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고 들었다.

“형식주의나 수량 관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갖가지 교훈을 살리니 업적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기업들은 실패 사례를 밖에 발표하지는 않는다. 혼다자동차가 유일한데, ‘실패 상’을 만들어 직원이 기술 개발에 실패해도 원인을 찾아내면 상을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의 독립이다. 과거 일본의 경영방식은 누군가가 결정한 것을 집단이 지키며 효율적으로 일한다는 것이었지만 이젠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이를 발표하고 집단이 공유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2001년 도쿄대 정년퇴직을 기점으로 실패학, 위험학, 창조학, 결정학 등을 오가며 정력적인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당초에 왜 실패학에 주목하게 됐나.

“계기는 도쿄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설계의 성공 사례를 말하면 재미없어 하지만 실패 사례를 말하면 눈이 빛나더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남의 실패담을 통해 배운다. 내가 본래 하고 싶은 것은 ‘창조학’이다. 가르치는 과목 이름도 ‘기계창조학’이다. 창조를 하려면 실패가 따라오니 실패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틀린다는 점이고, 틀렸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하타무라 요타로

▽1941년 도쿄 생

▽1966년 도쿄대 공학부 대학원 수료, 히타치제작소 입사

▽1968년 도쿄대 공학부 조교

▽1983년 도쿄대 공학부 교수

▽2001년 도쿄대 명예교수, 하타무라창조공학연구소 대표

▽2002년 NPO법인 실패학회 회장

▽저서: ‘실패학의 권고’ ‘실패학의 법칙’ ‘강한 회사를 만드는 실패학’ ‘실패로 배우는 제조업’ ‘창조학의 권고’ 등 다수

“실패 감추면 병이 돼… 필요한 실패도 있다”▼

日정부 대규모 예산 들여 1200개 사례 축적-연구

2000년 하타무라 교수가 저서 ‘실패학의 권유’를 내자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실패학 붐이 일었다. 그는 책에서 사람이 관련돼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실패’라고 정의하고, 이 실패를 소중히 다뤄 거기서 교훈을 얻자고 주창했다.

그는 실패학이란 ‘실패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이 뭔가 활동을 하면 반드시 실패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이때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실패에 대해 공유함으로써 집단의 지혜를 쌓자는 것이다. “성공은 99%의 실패 교훈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고도 했다.

그는 실패를 ‘필요한 실패와 있어서는 안 될 실패’로 구분하고 어떤 실패든 감추면 병이 되지만 드러낼수록 성공이 된다고 지적해왔다. 여기서 ‘필요한 실패’란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것으로, 이는 성장의 과정이 된다. 반면 ‘있어서는 안 될 실패’는 알면서도 반복되는 실패를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큰 실패는 작은 실패의 반복에서 나온다.

이런 그의 제창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 2002년에는 비영리법인 실패학회가 발족했다. 각자의 실패를 공유하자는 취지다. 현재 회비를 내는 회원은 1200여 명. 후지쓰 미쓰비시중공업 히타치 토토 도쿄전력 등 일본 유수의 기업법인들도 가입해 있다. 사실은 더 유명한 기업도 있지만 대외적으로 익명 처리를 요구한다고 한다. 회원들은 ‘실패 체험 네트워크’ 등 여러 분과로 나눠 활동하며, 연 1회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하타무라 교수는 최근 좀 더 적극적으로 실패 가능성을 예측하고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체제를 찾는 ‘위험학’을 연구하고 있기도 하다. 격변하는 경제 환경 속에서 위험학은 전환기의 경영 판단에도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

“성공담은 많다. 하지만 그대로 따라한다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비약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나 지금까지의 방식을 바꾸려 할 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정보는 크게 도움이 된다. 바다로 나아갈 때 어디에 암초가 있고 어느 시기에 폭풍우가 몰아칠지를 미리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성공하려면 실패를 바르게 예상해야 한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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