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길 잃은 기러기 엄마들

  • 입력 2008년 3월 15일 02시 50분


美 ESL 등록 체류자격 얻어 자녀 돌보던 한인 주부들

출석소홀-교내갈등 겹쳐 입학허가 취소돼 추방 위기

"아이를 공립학교에 넣기 위해선 제가 ESL(외국인을 위한 영어교습)에 등록하는 것 외에 마땅한 방법이 없었어요. 비싼 수업료를 냈으니 열심히 다녔으면 더 좋았겠지만 현실적으로 안 되더군요."

3년 전 관광비자로 미국에 온 A(41) 씨는 워싱턴 근교 소규모 사립대인 N 대학의 ESL 코스에 등록했다. 유학생으로 신분을 바꿔 미국에 눌러앉았고 두 자녀를 공립학교에 넣을 수 있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행을 감행한 뒤 줄곧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나날이었지만 주변에 비슷한 처지의 한인이 많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매일 오전 5시 반에 집을 나와 오후 6시까지 일하는 A 씨에게 오후 6시부터 4시간씩, 주5회 진행되는 ESL 출석은 벅찼다. 수업에서는 졸기 일쑤였고 곧 결석이 다반사가 됐다. 주간반에는 진짜 영어를 배우러 온 학생들이 많지만 야간반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규정상 결석이 잦으면 I-20(입학허가서)이 취소돼 유학생 비자를 잃게 되지만 그동안 크게 문제된 적은 없었다. 월 700달러의 수업료는 '유학생 신분 유지비용'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요즘 A 씨는 좌불안석이다. 한국인 ESL 수강생 470명 가운데 70명이 최근 대학 본교로부터 I-20 취소 통보를 무더기로 받았기 때문이다. 학생 신분이 박탈됐으니 미국을 떠나라는 것이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버지니아 주 애넌데일의 한인업소 밀집 지역에 있는 P 학원은 2002년 N 대학과 ESL 코스 위탁 운영 계약을 했다. '애넌데일 캠퍼스'라는 간판을 달고 학원 건물에 개설한 ESL 코스에는 갈수록 한인들이 몰려 수강생이 600여 명으로 늘었고 인근에 분원도 냈다. 최근엔 몽골인, 중국인, 태국인 수강생도 늘었다.

한인 교포인 P 학원 대표는 지난해 말 아예 대학 본교 인수에 나섰다. 이 대학은 재학생 800여 명의 대다수가 외국인 유학생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국인 학장 등 학교 운영진과의 갈등이 심화됐고 이사회는 1월 초 학장 해임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학장 등이 ESL 코스에 있는 70명의 I-20을 취소시키고 400명에겐 본교에 재등록해야 I-20을 받을 수 있다고 통보했다. 학장 측은 "길어도 2년 반 정도면 마치는 ESL을 3년 이상 다니면서 출석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있는 수강생들의 자격을 박탈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애넌데일 캠퍼스 대표 C 씨는 "대학 인수를 방해하려다 해고된 학장 측이 앙심을 품고 저지른 일로, 그들에겐 그런 결정을 내릴 자격이 없다"며 "출결 등 수업 관리를 철저히 해왔다. 일부 오래 다닌 학생은 석사과정에 진학하기엔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애넌데일 캠퍼스 관계자는 "해고된 총장 측이 문제가 있다고 고른 70명 가운데는 실제론 등록한지 6개월~1년반 밖에 안된 수강생들도 있다"며 "이민국에 확인한 결과 70명중 50명은 I-20이 아직 유효한 상태며, 취소된 사람도 나중에 행정착오로 인정되면 I-20을 되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에 온 사람들이 체류 신분 해결을 위해 ESL 코스 등에 등록하는 것이 이곳만의 현상은 아니다.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 대도시로 온 '기러기 엄마'들 가운데는 I-20을 발급해 주는 교육기관 중 상대적으로 입학이 쉬운 곳을 물색하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 자녀를 동반한 중년 주부가 유학비자를 받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일단 미국에 온 뒤 등록하는 것.

출결 및 성적 관리가 엄격한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자의든 타의든 대학 등록을 체류 신분 해결의 방편으로만 여기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런 경우 마음을 졸이며 지낼 수밖에 없다.

한 이민법 전문 변호사는 "관광비자로 입국한 뒤 유학생으로 신분을 바꾸면 나중에 미국에 재입국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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