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양두정치시대]<하>“해가 두 개일 수 있나”…

  • 입력 2008년 3월 1일 03시 21분


“나는 그(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제1부총리)를 믿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이 한마디가 효과를 발휘하면서 3월 2일 러시아 대선은 메드베데프 부총리의 승리로 끝날 것이 확실시된다. 푸틴 대통령은 5월 7일 퇴임한 뒤 총리실로 자리를 옮길 것으로 보인다.

현직 러시아 대통령이 임기를 채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나, 후계자와 함께 다시 국정을 이끄는 것 모두 러시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특이한 풍경이다.

푸틴-메드베데프의 양두정치라는 초유의 실험이 1990년대 ‘유럽의 병자(病者)’라는 굴레를 뚫고 급성장한 러시아를 새로운 무대로 이끌고 있다.

▽대선 이후 정국에 쏠리는 관심=29일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만난 교수와 학생 대다수는 “뻔한 선거 결과보다 선거 이후 러시아 정국에 관심이 더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부터 언론에 보도된 연방보안국(FSB)과 마약감시국 간의 주도권 다툼, 메드베데프 부총리의 크렘린 내부 인맥 분포, 메드베데프 부총리가 싫어하는 고위 인사는 누구인지 등이 이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교수는 “최고 권력은 나눠 갖지 못한다는 것이 러시아의 역사”라며 “두 사람이 권력을 동시에 행사하면 정국이 혼란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마리야’라고 이름을 밝힌 한 여학생은 “결과가 뻔히 내다보이는 러시아 대선보다 드라마 같은 미국의 대선 경선이 훨씬 더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 학생은 “진지한 학생과 교수 사이에선 대선 이후 러시아의 장래를 전망하는 토론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통치 스타일 변화 기대=메드베데프 부총리는 지난달 연설 스타일을 바꿨다. 43세의 대통령 후보인 그는 지난해까지 TV 인터뷰나 행사장에서 말을 빨리 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선거일이 다가오자 그의 말 속도가 지난해보다 느려졌다. 진지한 표정을 의식적으로 나타내려는 모습도 엿보인다.

길거리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은 메드베데프 부총리를 ‘리틀 푸틴’으로 불렀다. 한 상인은 “메드베데프 부총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FSB 출신인 푸틴 대통령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젊은 대통령이 최고 권력에 오른 뒤 푸틴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통치 스타일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하는 유권자도 상당수다.

크렘린 내부에서는 록 음악 애호가인 메드베데프 부총리가 푸틴 대통령보다는 자유주의 성향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가 “코소보가 분리 독립하면 유럽 안보가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말해도 ‘푸틴을 닮아 가려고 노력한 결과이지 진지한 경고로 볼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

정치 전문가들이 각종 매체에서 “젊은 대통령이 취임하면 고질적인 부패, 관료주의, 언론 탄압 등 푸틴 대통령이 8년간 남긴 부정적인 유산도 없어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도 새로운 통치 스타일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다.

▽정국 안정에 대한 우려=많은 전문가들은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라는 구도에서 러시아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지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러시아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부터 ‘삼권분립’이나 ‘견제와 균형’ 원칙과는 거리가 먼 초강력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해 왔다. 러시아 의회가 대통령을 견제할 수단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헌법학자들의 분석이다. 반면 내각을 대표하는 총리의 권한은 부총리와 장관 후보 추천권 등 대통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메드베데프 부총리가 취임 초기 헌법상의 권한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법으로 특별히 정하지 않은 분야는 푸틴 대통령과 상의해 권한을 분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한 외교관은 “헌정 사상 초유의 실험인 양두정치는 예기치 못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어 더욱 긴장된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치평론가 이반 사프란추크 씨는 “양두정치 체제가 권력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권력 핵심층이 집중된 대통령행정실 안보회의 FSB의 위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며 “내부 권력 투쟁에 따른 일시적인 혼란도 예상된다”고 말했다.

젊은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의 수렴청정을 받은 뒤 조기에 물러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주목받고 있다. 정치평론가 예브게니 민첸코 씨는 “핵무기 발사 단추와 석유 가스관을 통제하는 젊은 대통령이 단기간에 크렘린을 장악하지 못할 경우 푸틴이 또다시 대통령으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국 혼란 전망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에 대한 우려로 이어진다. 예브게니 야신 러시아경제대 교수는 “러시아의 정치 혼란은 경제 성장 궤도를 한순간에 이탈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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