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갑부 “게이츠가 별거냐”

  • 입력 2007년 11월 7일 03시 10분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MS)는 시장을 95%나 독점하고 있다. 우리 ‘텔멕스’의 멕시코 통신시장 지배율은 그보다 적은 92%다. 그런데도 왜 서구 언론은 우리에게만 비판적 잣대를 계속 들이대는가.”

최근 빌 게이츠 MS 회장을 제치고 세계 최고 부자에 등극한 멕시코 통신회사 텔멕스의 카를로스 슬림 회장은 때때로 이 같은 불만을 털어놓는다.

10월 말 현재 그의 총재산은 590억 달러로 멕시코 국내총생산(GDP)의 6.6%에 해당한다.

빌 게이츠의 총재산이 미국 GDP의 0.4%에 해당하고, 거부의 대명사로 독점적 지위를 누린 존 록펠러의 1937년 전성기 때 재산이 GDP의 2%에 못 미쳤던 것을 감안할 때 실로 엄청난 부의 집중이다.

슬림 회장을 비롯해 최근 인도, 중국, 러시아, 중남미 등 비(非)서방 지역의 기업가들이 세계의 억만장자 리스트 상위권에 속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급변하는 정치기류 속에서 독점적 사업권을 낚아채거나 기업 인수를 통해 성장한 사업가라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 빌 게이츠로 상징되는 신기술을 통한 성공 신화, 워런 버핏으로 대표되는 투자 신화, 중동의 석유 부호 등 기존과는 다른 개도국형 거부(巨富) 축적 판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텔멕스 성장의 발판은 ‘독점’=최근 격월간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 11·12월호를 비롯한 미국과 유럽 언론들은 슬림 회장의 독점적 지위를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슬림 회장이 세계적 부호로 도약한 발판은 1990년 통신 사업권을 거머쥔 것이었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국영 통신사 텔멕스를 민영화하면서 6년간 유선통신 독점 사업권을 줬다. 그는 경쟁자들에 비해 주당 8센트가 비싼 금액을 제시했고 결국 총 17억6000만 달러를 들여 최대주주가 됐다. 이후 텔멕스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매년 60억 달러의 순이익을 내고 있다.

레바논 출신 이민자의 아들인 그는 어릴 때부터 돈에 관한 남다른 감각을 보였다. 26세 때 종자돈 40만 달러로 자기 사업을 시작해 부동산으로 돈을 벌다가 1980년대 남미 경제가 위기에 휩싸여 금융회사 등이 매물로 나오자 싼값에 사들였다.

텔멕스 인수 후에는 이동통신 시장에 눈을 돌려 아메리카모빌을 인수했다. 건설 석유 전기 자동차 항공 언론 금융 유통 등 뻗치지 않은 사업영역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그는 검소한 생활로 유명하다. 호화 요트와 저택 대신 30년째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있다. 최근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는 공항에서 포드 승용차를 렌트해 스스로 운전하고 다니며 사업 파트너들을 방문해 화제를 모았다.

텔멕스의 독점적 지위를 놓고 멕시코 내에선 찬반론이 엇갈린다. “예전엔 전화 한 대를 놓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했으나 이제는 며칠이면 된다”는 칭찬이 나오는가 하면 “경쟁국에 비해 3배나 비싼 통신요금을 물고 있다”는 불만도 강하다.

멕시코의 정보통신 투자가 GDP의 3.1%로 일본 7.4%, 미국 8.8% 등 선진국은 물론 칠레 6.7%, 브라질 6.9% 등에도 못 미치는 것은 텔멕스가 독점적 시장 상황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인도-중국-동구권 “새 억만장자 산실”=지난해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 리스트에는 개발도상국 소재 기업이 52개나 올랐다. 올해 3월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의 억만장자 946명 리스트에는 인도인 14명, 중국인 13명이 포함돼 있다. 이는 불과 1년 만에 2배나 늘어난 수다.

옛 사회주의권에선 휘발성 강한 정치, 시장 상황이 거부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옛 소련의 석유, 가스 회사를 인수한 로만 아브라모비치, 미하일 프리드만 등을 비롯해 러시아인 19명이 억만장자 리스트에 올랐다.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에서도 억만장자가 출현했다.

인수합병(M&A)도 개도국 부호 출현의 핵심 요소다. 부호 5위에 오른 인도의 락시미 미탈은 1990년대 공산당이 통치하던 주(州)의 철강 기업을 인수하면서 철강재벌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00억 달러의 부를 가진 이집트의 통신기업가 나기브 사와리스 오라스콤 회장은 지난해 이탈리아 통신사를 합병하는 모험을 통해 12개월 만에 재산을 74억 달러나 늘렸다.

이들 신흥 부자의 부 축적 속도는 매우 빠르다. 슬림 회장의 재산은 지난해 한 달 평균 10억 달러꼴로 불어났다. 그를 포함해 멕시코 10대 부자의 재산총액은 2000년보다 3배나 늘었다. 이들 중 절반이 민영화의 혜택을 받았다는 연구결과도 지난주 나왔다.

이들의 독점적 지위에 대한 비판도 점증하고 있다. 멕시코 중앙은행은 최근 “만약 건강한 경쟁이 살아 있다면 멕시코 경제의 성장률이 1%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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