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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0월 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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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였던 그는 메스 대신 총을 들고 혁명전선에 뛰어들어 쿠바혁명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쿠바 산업부 장관직을 버리고 남미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다 사살 당했다. 당시 나이 39세였다.
게바라 사망 40주기를 기념해 그가 숨을 거둔 볼리비아의 소도시 라이게라와 1997년 발견된 그의 시신이 안치된 쿠바 산타클라라 등에선 대대적인 추모 행사가 벌어질 예정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도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게바라 체포 작전을 주도한 볼리비아 정부군의 가리 프라도 예비역 장군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1967년 10월 8일 오후 3시경 포위망을 좁혀 가자 홀로 있던 게바라가 ‘쏘지 마라, 내가 체(Che·친구를 부르는 스페인어)다’라며 순순히 투항했다”고 증언했다.
현장에 있던 베르나르디노 우안카 하사는 게바라가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낫다”는 말도 했다고 밝혔다. 강철의 혁명가 게바라도 죽는 순간에는 ‘영웅’이기보다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무기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동료들과 함께 있던 게바라가 붙잡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종종 말해 왔다. 게바라는 체포된 다음 날 9발의 총알을 맞고 사망했고 신원 확인을 위해 양 손이 잘린 뒤 인근 비행장에 매장됐다.
게바라의 말년 게릴라 활동에 대해 쿠바 정부는 그의 행적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지만 미국과 당시 남미 군사정부는 그의 움직임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남미 군사정부 간에 오간 1966년 10월 3일자 비밀보고서에는 “게바라가 브라질 콜룸바에서 오스카 페레이라라는 가명을 쓰고 있으며 수염을 길렀다”고 돼 있다고 이를 입수한 AFP통신은 전했다.
전창 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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