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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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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미국 의회 사상 처음 열리는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는 군위안부 피해자인 한국인 할머니 2명과 함께 푸른 눈의 백인 할머니가 나와 증언한다.
네덜란드인으로 호주 킹즈우드 시에 살고 있는 얀 뤼프 오헤르너(사진) 씨. 올해 84세인 그는 꽃다운 나이인 19세 때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군위안부 생활을 했다.
오헤르너 씨는 7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60여 년 전 겪었던 끔찍한 경험, 그리고 그때의 일이 그 후 자신의 삶에 어떤 고통을 남겼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줬다. 오헤르너 씨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태어났다. 기술자인 아버지는 사탕수수 재배 농장에서 일했다. 화목한 가정에서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하던 오헤르너 씨는 1942년 3월 자바 섬을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암바라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어 1944년에는 오헤르너 씨만 군위안부 수용소(Comfort station)로 끌려갔다.
“여성에게 첫 성 경험이 갖는 의미는 큽니다. 그 첫 경험이 성폭행, 그것도 군위안소에서의…. 그것이 내 인생에 어떤 굴욕감과 정신적 상처를 남겼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추해 보이면 더는 남자들이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머리를 모두 잘라냈지만 오히려 일본군의 호기심의 대상이 됐다. 심지어 일본인 의사들도 성폭행 대열에 합류했다고 한다.
“군위안부 수용소에서 돌아온 뒤 어머니에게는 겪은 일을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던 어머니는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가슴에만 담아 온 상처를 1992년 결국 토해냈다. 당시 유고 내전에서 여성들이 무참히 성폭행당한다는 뉴스에 세계가 분노하고 TV에서는 한국의 군위안부 피해자 3명이 공개석상에 나서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다는 뉴스가 방영됐다.
그동안 몰래 보관해 왔던, 자신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글을 우편으로 두 딸에게 보냈다. 딸들은 수기를 읽은 뒤 통곡하다 어머니를 찾아가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후 오헤르너 씨는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군위안부 관련 행사에 참석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전쟁으로 성폭행 피해를 본 여성들을 돕는 일에 여생을 바쳐 왔다. 일본 정부가 보상금 성격의 ‘아시아 여성기금’을 만들었을 때 오헤르너 씨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회복’입니다. 2년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고교생들이 일제가 저지른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더군요. 일본 정부가 엄중히 사과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은 가 보지 못했다는 그는 “한국인 친구가 많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몇 달 전에도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몇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어요. 말은 서로 잘 안 통했지만 금방 교감이 되더군요.”
미국 의회로부터의 청문회 증인 출석 초청은 지난주에 받았다. 워싱턴으로의 여행에 남편이 동행하느냐고 묻자 “남편은 11년 전 세상을 떠났다”며 웃는다. 오헤르너 씨는 남편 루프 씨를 종전 직후 수용소에서 만났다. 그는 일제 패망 후 테러 공격으로부터 수용소를 지키기 위해 주둔한 영국군이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살다 1960년 호주로 이민했다. 이 대목에서 묻기 어려운 질문을 꺼냈다. 남편에게는 얘기를 했느냐고.
“결혼 전 말했어요. 남편은 듣기만 하더군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후로 남편도 나도, 한 번도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어요.”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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