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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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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렁에 빠진 이라크전쟁으로 궁지에 몰린 조지 W 부시 행정부 핵심 인사들이 최근 자주 사용하는 논리가 ‘한국을 보라’다.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이식함으로써 중동에 민주화 도미노를 일으키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목표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것 아니었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한국의 성공 사례를 들어 간접 반박하는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15일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이라크가 당장 2007년에 중동 민주화의 횃불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영 불가능한 건 아니다”며 “한국도 오랜 기간 (민주화를 이룩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민주화의 등불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부시 대통령 역시 자신의 상황을 50여 년 전 6·25전쟁 참전, 베를린 공수작전, 마셜 플랜을 결정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의 시련에 비교한다. 트루먼 전 대통령의 지지도가 당시엔 바닥을 기었지만 당시의 노력에 따라 오늘날 냉전 정책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지 않느냐는 것.
딕 체니 부통령도 7월 27일 6·25전쟁 정전 기념식에서 “6·25전쟁에서 미국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오늘날 한국의 번영과 민주주의가 입증해 준다”고 강조한 바 있다.
15일 퇴임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도 이라크전의 당위성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암흑뿐인 북한과 휘황한 빛에 휩싸인 남한의 야경이 대비되는 위성사진 얘기를 단골 레퍼토리로 꺼내곤 했다.
행정부뿐이 아니다. 기자가 보수적인 싱크탱크 연구원들에게 “오랫동안 전체주의 통치를 받던 사회에 전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주입하겠다는 건 ‘책상머리’에서 나온 과욕 아니냐”고 물으면 반드시 나오는 대답이 한국의 사례다.
물론 한국의 과거와 이라크의 상황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의 물적·정신적 토대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된 6·25와 이라크전은 전쟁의 당위성에서도 비교 대상이 아니다. 한국이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해방공간의 극심한 이념갈등과 참혹한 전쟁, 그 후에도 35년이 넘는 지난한 투쟁을 거쳐야 했다는 것을 이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이 참전해 전쟁을 치른 나라 가운데 번영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이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 인사들은 “이라크에서 흘리는 미군의 피도 헛되지 않을 수 있다”는 나름의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 싱크탱크 연구원은 “럼즈펠드 전 장관 같은 강경파들은 한국의 현 정부를 심히 못마땅해 하고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 의무를 ‘성가신 것(Pain in the neck)’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도 공개석상에선 ‘한미 관계에는 이상이 없으며 한미 간의 동맹은 여전히 소중하다’고 거듭 강조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강경파의 이 같은 태도에는 한국의 발전을 통해 ‘이라크에 민주화 이식’ 논리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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