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고구려 물론 한강 이북까지 원래 중국땅”

  • 입력 2006년 9월 5일 19시 33분


코멘트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邊疆史地)연구중심(변강연구중심)이 고조선부터 발해까지 한민족의 고대사를 자국의 역사로 왜곡한 논문을 무더기로 발표했다.

중국 정부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회과학원이 한민족의 고대 역사를 송두리째 중국역사라고 공식연구 성과로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2004년 역사문제에 관한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약속한 한·중 간 '구두양해(口頭諒解)'를 위반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중 간 역사 갈등이 재연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사회과학원은 지난해 9월 변강연구중심 홈페이지에 올린 이들 논문을 적어도 올해 안으로 책으로 정식 출간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변강연구중심이 홈페이지에 올린 논문은 연구가 완료된 27개 논문 가운데 18편으로 모두 요약본이다.

논문들은 한결같이 고조선부터 발해까지의 역사가 일맥상통하는 한민족 역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의 지방 민족정권역사로 중국 역사라고 주장했다. 특히 발해는 중국 당(唐) 왕조가 직접 감독한 군(郡) 지역에 불과했다고 기술했다.

장비붜(張碧波) 연구원은 '기자(箕子)와 기자조선'이라는 논문에서 "기자를 은(殷)대 갑골문자와 전진(前秦)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며 "그가 한반도에 최초의 지방정권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한국 학계에서는 기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또 "기자조선은 주나라와 진나라에 복속된 국가로 위만(衛滿)의 정변으로 멸망했다"며 "기자조선이 이후 위만조선과 한(漢)4군,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시작점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자오룬밍(焦潤明)은 '국제법과 중국-북한 국경선 문제 논쟁'에서 "애당초 한강 이북까지가 중국의 영토였으나 신라-백제 등의 침탈로 영토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웨이궈충(魏國忠) 연구원이 작성한 '발해국사'는 "발해 건국의 주도세력은 고구려인이 아니라 말갈족으로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은 발해 초기 말갈을 정식국호로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북한 학자들이 발해역사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지만 민족적 감성에 사로잡혀 학술연구의 정상궤도에서 벗어났다"고 폄훼했다.

우위환(武玉環) 연구원이 쓴 '발해이민의 통치와 귀속(歸屬)연구'는 "발해가 멸망한 뒤 유민들이 요(遼) 및 금(金)나라로 옮겨가 결국 중화민족으로 융화됐다"고 주장했다.

주궈천(朱國¤) 연구원이 발표한 '발해사론'은 발해의 분묘형태와 장례의식, 기물(器物)과 도기(陶器), 관혼상제 등을 고구려와 비교함으로써 차이점을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중국의 개별 학자들이 고조선부터 발해까지의 4000년 가까운 역사를 모조리 중국 역사라고 주장한 일은 간헐적으로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서 파문이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서경대 교수)은 "논문 내용은 동북공정을 시작할 때부터 나온 것으로 새로운 게 아니다"며 "그러나 중국 정부가 이를 사회과학원의 공식연구 성과로 인정해 발표했다는 점에서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이징=하종대특파원 orionh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