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월드워치]美 백악관앞 10만명 반전시위

  • 입력 2005년 9월 2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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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힘, 애국주의, 개인의 의무와 책임, 자유의 확산….’

지난 10년간 이러한 보수적 기류가 정치를 압도했던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적어도 24일 하루만큼은 리버럴 이상주의가 만발했다.

이날 오후 4시 워싱턴 시내 엘립스 잔디공원. 백악관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시위대가 속속 모여들었다.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여름휴가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반전(反戰)의 불씨를 되살린 ‘반전의 어머니’ 신디 시핸 씨의 연설도 있었다.

수만 명의 반전 시위대가 모였지만, 한국인에게 익숙한 “…타도하자” “…쟁취하자”는 식의 구호나 통일된 운동가요가 없는 미국 시위는 좀 밋밋했다. 소형 확성기로 목이 쉬도록 반전 메시지를 외치는 ‘지도부’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미국 시위 관전법은 티셔츠나 스티커, 피켓의 구호를 잘 읽어 보는 것’이란 구전(口傳) 지침은 이날도 유효했다.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빼앗는 전쟁을 중단하라” “우리 세금 걷어다가 명분도 없는 전쟁을 치른다고?” “거짓말은 그들이 했지만, 정작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것은 우리”라는 반전구호는 점잖은 편에 속했다.

“(허리케인으로 무너진) 제방이나 만들어라. 전쟁이 웬 말이냐”처럼 부시 행정부의 아픈 곳을 꼬집는 구호도 있었고, “부시 대통령, ×먹어라”라는 원색적 메시지가 담긴 티셔츠도 눈에 띄었다.

국세청(IRS) 소속 공무원으로 지난해 은퇴한 에릭 매킨리(61) 씨는 스스로를 “(부시 행정부 때문에) 화가 난 시위 초년병”이라고 불렀다. 젊은 시절 육군에서 3년간 군 생활을 했다는 그는 “미국을 지키는 일에 나도 할 만큼 했지만, 거짓말로 점철된 이번 전쟁은 도저히 동의 못 한다”고 했다.

워싱턴에서 1시간 거리인 볼티모어의 2년제 대학에서 영어를 강의하는 메리엄 루스차일드(59·여) 씨. 그는 “우리 시위로 당장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요구의 정당성이나 여론이 우리 편이란 확신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뿌듯하다”고 말했다.

땅거미가 지면서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수백 개의 하얀 나무 십자가 옆에 1인용 텐트가 줄줄이 설치됐다. 이들은 이날 무엇을 얻었을까.

참가자들은 대체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난 소수가 아니었다”라는 연대감에 만족을 표시했다.

이날 시위에서 유일하게 ‘악다구니’가 등장한 곳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잇는 왕복 8차로 규모의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였다.

경찰이 1, 2m 간격으로 늘어선 인도 변의 아슬아슬한 경계 양쪽에서는 전쟁 지지자와 반대자의 입씨름이 벌어졌다.

‘반전시위 반대자’들은 “이라크를 떠나면 독재를 되살리게 된다”거나 “무책임한 (전쟁 반대) 주장으로 미국인은 죽어간다”라고 외쳤다. 시위대도 물러서지 않고 “너희들 때문에 미국만 망신이다”라는 말로 맞받았다.

상대에 대한 증오감 탓인지 현장에는 남의 말을 들으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분열된 미합중국(Divid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미국 사회의 속살은 이렇게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이날 반전시위에는 2003년 3월 이라크전쟁 이후 최대 규모인 워싱턴 10만 명을 포함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런던 파리 로마 코펜하겐 등 미국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모두 30만 명이 참가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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