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5주년]한-일 지성 e메일 대담

  • 입력 2005년 3월 31일 19시 31분


《한일관계가 또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가슴엔 분노와 우려, 안타까움이 뒤섞인다. ‘가까우면서도 먼 이웃’인 두 나라가 보다 발전적인 관계를 정립해 21세기 대(大)아시아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지혜는 없을까.

동아일보는 창간 85주년을 맞아 서울대 정운찬(鄭雲燦·58) 총장과 도쿄(東京)대 사사키 다케시(佐佐木毅·63) 총장의 e메일 대담을 마련했다. 양국을 대표하는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두 총장은 한일관계, 대학과 지성의 미래, 세계화 등 시대의 화두들에 대해 고견을 아낌없이 털어놓았다. 이 대담은 3월 2일 열린 서울대 일본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사사키 총장과 정 총장이 나눈 좌담을 토대로 본보가 두 총장에게 온라인상으로 추가 질의를 보내 답변을 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사사키 총장은 1일자로 4년간의 임기를 마친다.》

▽정운찬 총장=최근 한일 양 국민간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어디에 기인하는지를 묻는 질문을 요즘 많이 받습니다.

▽사사키 다케시 총장=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므로 지금에 와서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겠지요. 양국이 체험한 역사 속에 큰 대립이 있었고, 그 역사를 바라보는 양국 후손들의 느낌이 서로 다른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정 총장=저는 한국과 일본이 역사적으로 서로 상대방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있다는 점도 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의식은 상대방의 우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자국의 문화와 다양성을 높이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는 방향보다는 무시 또는 멸시의 방향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더구나 일본의 한국침략과 지배의 역사적 경험이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협력과 보완의 기회를 무산시켰다고 봅니다.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우월감, 그리고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잠재적 시혜의식과 우월감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잠복되어 있다가 민감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폭발적으로 노출되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두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양국의 이른바 지도층, 즉 주요 담론 생산층의 역사인식이 다양한 매체와 장(場)을 통해 사회적 관념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 담론 생산층 내부에도 집단들 간에 이념이나 현실적인 목표, 이해관계, 권력관계 등에서 차이가 있죠. 이런 점들도 그 배경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키 총장=우리 역사인식에 잠재해 있는 과거 대립의 문제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양 국민이 한일관계 개선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새로운 관계설정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이며, 상호 노력과 협조를 통해 문제를 억제해 나가고 또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정 총장=역사인식의 괴리를 풀기 위해선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부끄러운 역사라도 숨기거나, 왜곡시키지 말고, 오늘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겸허한 판단에서 과거의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자국 위주의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보편성에 입각한 교육이 필요하며, 상호간 이해를 깊이 할 수 있는 교육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상대방의 역사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주장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양국의 역사가 재구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함으로써 문제가 어디 있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사사키 총장=대학은 이런 문제에 있어서 냉정한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대학이 정치적 움직임에 흔들리거나 이용당하면 대학으로서의 참된 역할을 못하는 겁니다. 또 눈앞의 실리나 이해관계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대학은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갈등이 진행 중인 미묘한 문제를 냉철한 이성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도 정확한 사료와 심도 깊은 연구 등을 통해 냉정하게 재검토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정 총장=대학은 차분하고 치밀한 학문적 연구를 통해 이러한 구조를 밝혀낸다는 점에서 저널리즘이나 일반 시민사회에서 하기 어려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두 대학이 주변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일본연구소(서울대), 조선문화연구팀(도쿄대) 등을 만들어 서로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환기하고 증폭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사키 총장=이 조직들이 새로운 관계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도쿄대 조선문화연구팀은 한국에 대해 보다 정확한 연구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것입니다. 또 일부 미디어에 의존한 역사인식에서 빚어질 수 있는 오해와 왜곡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대학은 이미 상호 교수 교환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전혀 다른 시각의 생생한 목소리가 학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어 더욱 확대할 필요성이 느껴집니다. 대학 운영 시스템이나 다양한 아이디어의 교류도 필요합니다.

▽정 총장=양국의 상호 관심 영역은 폭넓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 독도나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서 보듯이 민감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교류가 급속히 냉각되는 것은 양국의 관계가 아직 모색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계에서 질적 교류를 확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사키 총장=한일간에 존재하는 사회적, 지정학적 문제도 아직은 변수입니다. 아직 일본에서는 한국을 북한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간접적인 영향이 교류의 본질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 '베세토하'(BeSeToHa·베이징대-서울대-동경대-하노이대)나 AEARU(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처럼 이 지역에 처음으로 대학간 네트워크가 탄생하는 등 상호 이해와 협력의 대상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시아화 현상'은 기존의 미국 대학들과의 교류만큼이나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정 총장=베세토하 계획은 공통의 역사적 자산을 확인하는 데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으로 삼아, 국제적 공헌의 길을 함께 열어가자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번영과 평화가 세계의 번영과 평화의 구현에 핵심적인 요인임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으므로 이를 위한 인재양성과 학술교류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또 아시아문화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공통의 유산이 각국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검토하고, 서로 인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아시아의 문화공동체를 이룬다는 구상입니다. 이를 위하여 교과목과 교재의 공동개발, 한자(漢子)의 통일, 교환강의와 공동연구 등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는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예정입니다.

▽다케시=그같은 과정에서 두 대학은 항상 핵심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동아시아를 미국 유럽에 버금가는 국제적인 연구중심지로 만드는 것이 공통의 목표입니다. 이미 동경대와 서울대는 훌륭한 인적자원과 교육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두 대학이 항상 주체가 되지는 않더라도 교류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고 활성화 시켜 학문과 기술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관리능력과 글로벌 리더쉽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각 대학이 교육, 연구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동경대는 지난해 4월 국립대에서 법인대학으로 바뀌면서 업무 추진이나 변화와 개혁에 있어 훨씬 신속하고 능률적인 구조가 되었습니다. 또 대학원 중심의 '연구중심대학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비율을 5대 5까지 떨어뜨렸습니다. 또 일본에선 드물게 법과대학원을 개설해 인문, 사회, 교육, 법학계열 학부생에게 심도 깊은 학업을 위한 동기부여를 했습니다. 특히 막연히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보다는 특정 영역에서의 최고를 만드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정=서울대는 대학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2002년부터 크게 4가지 비전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것은 대학의 다양화, 기초교육 강화, 대학의 슬림화, 학문후속세대 양성 등입니다. 변화의 물꼬는 이질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됩니다. 이를 위해 대학의 인적, 물적 다양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또 물질이든 사상이든 기초가 튼튼해야 살을 덧붙일 수 있기 때문에 기초교육 강화를 위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부피가 작고 가벼워야 합니다.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원감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든 변화의 목적은 오직 학문후속세대를 제대로 양성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우수한 외부 인재를 유치해 한 단계 성숙한 학문을 실현할 수 있도록 대학의 국제화에 많은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해외 대학과의 교류협정 체결은 양보다는 질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외국으로 학생을 내보내는 것보다 효율적인 외국인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외국인 전용 기숙사를 건립하고 영어강의를 확대 시행키로 하는 등 다양한 학업, 복지 환경을 개선하고 있습니다.

▽다케시=동경대가 좋은 연구자를 배출하고 연구 성과를 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고급 인재를 유치하는게 당면과제입니다. 동경대는 앞으로 범아시아 지역, 세계 각지에서 신입생을 선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현재도 대학원생 1만4000여 명 가운데 2000여 명이 외국학생입니다. 정부가 1995년부터 실시한 '박사후 과정(Post-Doctor)'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나 외국인에 대한 장학금 확대는 해외 우수인재 유치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학차원에서는 해외대학과 공동학위제도나 학생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련의 과정은 모두 대학이 시민사회의 기반이 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대학은 첨단 선진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해 그들이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도록 하는 곳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지식이 단순히 지식으로 머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교양강화를 통해 사회를 이끌어 갈 인재를 길러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른바 수준 높은 시민사회가 실현되도록 학생들이 올바르고 다양한 교양을 기르도록 돕는 것도 대학의 주요 과제중 하나입니다. 이를 위해 모든 학생들이 평등한 조건아래 학문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철저히 사회와 차단되어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정 총장=미래의 지도자 양성과 학문 발전은 대학이 안고 가야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축입니다. 특히 협소한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무대로 진출하는 인재양성 교육기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선택과 집중을 통한 핵심 연구역량 강화와 기초교육 강화를 통한 내실화를 꾀해야 합니다. 또 이제는 당면 과제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일반인들에겐 생활화 되어버린 국제화 또는 세계화가 대학에서도 느껴질 수 있게끔 대학이 재정적 정책적으로 훨씬 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대학은 저마다 차별화된 전략과 비전설정을 통해 다양한 국내외 인적자원을 배출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사키 총장=이제 한국과 일본 뿐 아니라 아시아의 젊은이들은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자기 나라, 그 안에서만 생각해서는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 입니다. 세계경쟁사회에서 국제적인 리더로 성장하려면 국가를 뛰어넘는 생각과 관심을 갖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정 총장=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일류국가의 모습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강한 실력을 갖춘 '강소국가(强小國家)'또는 '강중국가(强中國家)'입니다. 비록 규모는 세계 1등이 아니더라도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알차게 다져서 우리 사회에 건강한 활력을 불어넣는 강건한 경제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재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며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빈약한 기초분야에 대한 학습을 더욱 착실히 할 것을 당부합니다.

e메일 대담 진행 및 정리=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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