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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1월 5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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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정상회담 장소로 고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는 1870년대 한반도 무력점령,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의 본거지였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자살 비행을 강요받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의 발진 기지였다. 사이고와 특공대원들을 영웅으로 받드는 군국주의 악령이 곳곳에 기념물로 살아 숨쉬는 곳이다.
한국 정부는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고 반발했으나 일본 정부는 4일 이를 무시하고 개최 장소 불변 방침을 밝혔다.
주최국이 회담장을 정하는 외교 관례로만 보면 한국의 이의 제기가 오히려 비례(非禮)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전제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다. 회담장 선정조차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무례한 일이다. 더구나 일제 잔재에 따른 역사청산 문제로 내홍을 겪고 있는 한국과의 회담이 아닌가.
일본의 무례함은 작년 노 대통령 방일 때 한국의 현충일인 6월 6일에 일본 제국주의의 최고 상징이었던 천황과의 만찬을 갖도록 한 일정에서도 나타났었다. 방일 수일 전 자민당 간부의 창씨개명 망언, 도착 당일 전시대비 관련 법안의 의회 통과 등도 손님을 맞는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도 오판과 무책에 대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사전 답사를 할 때 이런 문제를 확인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관련 공무원들이 역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밝힌 노 대통령의 제주 정상회담 선언에 손발이 묶여 일본에 끌려 다닌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내년은 한일수교 40주년을 기념한 ‘한일 우정의 해’다.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신의를 저버리고 뒤통수를 치는 이웃과는 덕담을 나누고 건배를 들며 기념사진을 찍어 봐야 우의가 다져질 리 없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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