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공포의 선거

  • 입력 2004년 11월 2일 18시 23분


덤불 사이 어두운 그림자. 늑대 떼가 배회하는 사이로 음습한 소리가 깔린다. “약하면 미국에 해를 끼치려는 놈들을 불러들인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존 케리 민주당 대통령후보를 공격하는 정치광고다. 케리 후보라고 가만있을 리 없다. 기관총이 난사되는 가운데 이라크 무장세력이 부상한 미군을 끌고 가는 흉흉한 광고다. “지금도 미국인은 납치되고, 인질로 잡히고, 참수되고 있다”는 내레이션. 2004년 미국 대선을 관통하는 주제는 공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버드대 신경과학자 대니얼 시겔 교수는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했다. 두려움을 느끼면 왼쪽 뇌에 자극이 덜 가서 논리적 사고가 멈춘다는 것이다. 옆에서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 줘도 소용없다. 뇌는 이미 뭔가 의지할 만한 것을 찾는 상태다. 말하는 내용보다는 그 목소리 톤에 더 신경 쓴다. 논리적인 케리보다 부시가 더듬대며, 침을 튀기며 하는 소리에 미국의 보통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버지 여기 있다. 내가 있으니 걱정마라” 하듯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는 얘기다.

▷오사마 빈 라덴이 공포의 메시지를 비디오테이프에 실어 보내기 전, 실제로 빈 라덴을 광고에 내보냈던 것도 부시 쪽이었다. 공화당 지지파인 ‘미국을 위한 진보’ 그룹은 그의 사진과 테러리스트들의 모습을 넣어 ‘(유약한) 케리가 이 광신적 살인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위협했다. 전설적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는 CNN에 나와 “머리 좋은 백악관 정치고문 칼 로브가 이 사건을 만들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테러와 전쟁 중임을 일깨움으로써 ‘전쟁 사령관’ 부시를 부각시키려 했다는 음모설도 나돈다.

▷공포를 무기로 한 정치광고에 영향을 덜 받는 쪽은 부동층이라고 미시간대 테드 브래더 박사는 말한다. 정당 선호도가 확고하고 후보에 대해 잘 아는 ‘영리한 유권자들’이 오히려 흔들린다는 것이다. 일반적 통념과는 다른 연구결과다. 미국인들이 영향을 받든 안 받든 문제는 공포광고를 못 본 지구촌 사람들까지 선거 후의 미국이 무서워진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으로 부시가 되든, 케리가 되든 공포의 세계가 다가올까 봐 두렵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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