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을 사수하라” 수천명 인간방패…나자프에 민간인 집결

  • 입력 2004년 8월 17일 19시 03분


《16일 이라크 중남부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에 버스와 트럭들이 속속 도착했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이라크인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은 미군과 이라크 보안군의 총격을 피해 서둘러 시아파의 성소(聖所)인 이맘 알리 사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기는 갖고 있지 않았다. 미군과 보안군의 공격에 맞서 이맘 알리 사원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 그중에는 시아파뿐 아니라 수니파와 쿠르드족도 섞여 있었다. 로이터통신은 나자프 상황을 이처럼 보도하며 “2000여명의 이라크인 자원자들이 이맘 알리 사원을 지키기 위해 ‘인간방패’를 형성했다”고 전했다.》

▽최후의 항전지, 이맘 알리 사원=이라크인들은 가로 세로 80m에 불과한 사원의 뜰에 집결한 뒤 시아파 지도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를 연호하며 옥쇄(玉碎)를 다짐했다. 로이터는 자원자 대부분이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고 전했다. 자원자인 파딜 아메드는 “미군이 사원을 공격하면 맨몸으로 전차에 맞설 것”이라며 “사드르와 나자프를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대항하겠다”고 주장했다.

비무장 이라크인들이 이맘 알리 사원에 인간띠를 형성하면서 이라크 과도정부와 미군은 딜레마에 빠졌다. 12일부터 미군 2000여명과 보안군 1800여명이 나자프 북쪽 공동묘지에서 총공세를 펼치고 있지만 시아파가 ‘성소 중의 성소’로 꼽는 사원까지 파괴할 경우 정치적 부담이 엄청나기 때문. 17일에는 미군 전차가 이맘 알리 사원 500m 앞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한 적도 있다.

무장한 메흐디 민병대의 저항도 필사적이다. CNN방송은 16일 200여명의 민병대원들이 “사원이 공격당하면 몸에 두르고 있는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위협하는 모습을 전하기도 했다. 4일부터 시작된 미군과 보안군의 나자프 총공세로 메흐디 민병대 수백명과 미군 8명이 사망했다.

▽막바지 중재 움직임=15일 이라크 입법부 구성을 위해 소집된 국민회의는 최악의 나자프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대표단 60명을 현지에 급파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나자프 사태의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반발을 우려하는 과도정부는 일단 ‘저항세력은 소탕하되 성지는 보호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라크 내무부는 “이라크 보안군에 대해 성스러운 이맘 알리 사원을 공격하지 말 것을 분명하게 지시했다”고 밝혔다.

사드르측 인사인 알 사이바니는 로이터에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어떤 중재도 받아들일 것이며 국민회의 대표단도 환영한다”고 말해 협상의 여지를 남겼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이암 알리 사원은…시아파 최대성소▼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180km 떨어진 나자프는 ‘사자(死者)의 도시’로 불린다. 시내 한가운데 시아파 최고 성소인 이맘 알리 사원이 자리 잡고 있고, 북쪽에는 시아파 교도라면 누구나 묻히고 싶어 하는 600ha 규모의 공동묘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미군과 과도정부군에 맞서 시아파 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의 메흐디 민병대가 전투를 벌이는 곳도 이 공동묘지 일대다.

중부 카르발라의 이맘 후세인 사원과 함께 시아파 최대 성소로 꼽히는 이맘 알리 사원에는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사촌이자 사위인 이맘 알리 이븐 아루 탈리브가 묻혀 있다. 이맘 알리는 당시 수니파와의 갈등 때문에 암살당했다.

이맘 알리의 무덤은 977년경 처음 만들어졌으나 수차례 파괴되었다가 다시 지어지면서 사원의 형태를 갖췄다.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은 1991년 이 사원을 시아파 저항세력의 근거지라며 파괴했다. 일각에서는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2년 뒤 복구돼 다시 문을 열었다. 이맘 알리 사원은 메카로 향하는 성지순례의 출발점으로 매년 수백만명의 순례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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