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월드워치]2차대전 종전 8월15일 일본은…

  • 입력 2004년 8월 15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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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종전기념일’로 여기는 15일 도쿄(東京)에는 ‘80년 만의 폭염’을 식혀주는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이 합사(合祀)된 야스쿠니(靖國)신사의 참배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아침 일찍부터 일반 참배객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이 중에는 전몰자 유족도 적지 않았지만 확성기와 차량을 동원하고 ‘위대한 대일본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우익 세력의 목소리가 더 컸다.

“전몰 영령을 모독하고 부당한 내정 간섭을 일삼는 중국에 항의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오늘 같은 날, 어째서 야스쿠니신사를 찾지 않는가.”

오전 10시경 인근 지하철역에서 야스쿠니신사로 가는 길은 이런 구호로 넘쳐났다. 마이크를 잡고 외치는 30대 청년은 작년 8월 15일에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던 인물이었다. 우익단체 회원은 ‘내년에도 계속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할 뜻을 밝힌 고이즈미 총리를 격려하자’는 유인물을 행인들에게 건네고 있었다.

야스쿠니신사 정문까지 200여m에 이르는 광장과 도로는 우익단체들이 내붙인 격문과 구호로 어수선했다.

‘영령에 답하는 모임’이라는 단체는 참배객들을 상대로 ‘중국 내정간섭 규탄’ 서명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1972년 일본과 중국이 국교를 맺을 때 상대방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며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문제 삼는 것은 이 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축구전쟁’과 영토분쟁 등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을 반영한 듯 이날 야스쿠니신사 주변은 ‘중국 성토’ 일색이었다. 한국을 비난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최근 들어 역사문제에 대한 대응을 자제하는 ‘점잖은 외교’를 했기 때문일까. 결코 반갑지만은 않았다.

양심단체인 ‘평화유족회 전국연락회’ 회원 150여명은 인근 건물에서 실내 집회를 갖고 야스쿠니신사 부근까지 도보시위를 벌였지만 우익의 기세에 눌려 이내 행진을 중단했다.

지도층 인사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도 잇따랐다. 초당파 의원모임인 ‘모두가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 58명이 집단 참배했고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경제산업상 등 현직 각료 4명이 참배 행렬에 가세했다. 대리 참석자를 보낸 의원도 99명이나 됐다.

역사 관련 망언으로 자주 물의를 빚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5년 연속 참배하면서 “내년엔 천황도 참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이 지날수록 일본의 ‘전쟁 책임’을 호소하는 양심세력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그 자리에는 ‘일본은 잘못이 없다’는 우익 논리가 확산되고 있다. 패전 60주년이 되는 내년 8월 15일엔 ‘정말 해괴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요미우리 사설 ‘8·15궤변’▼

일본의 대표적 우익성향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이 지난해 8월 15일자에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A급 전범’을 옹호하는 사설을 실은 데 이어 올해엔 ‘실행범’ 격인 ‘B, C급 전범’을 적극 두둔하고 나섰다.

요미우리는 15일 ‘B, C급 전범을 잊지 않으리라’는 사설에서 “실제의 B, C급 전범 재판은 도쿄재판(A급 전범재판)처럼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내용이 많다”며 “상관의 명령에 따라 포로를 처형한 병사에게도 사형 판결이 선고된 사례가 있다”고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전후 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은 25명이 유죄판결을 받아 이 중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B, C급 전범 재판에서는 5700명이 포로 학대 및 민간인 살상 등의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돼 920명이 처형됐다.

이 신문은 미군의 이라크포로 학대를 거론하면서 “B, C급 전범에게 적용된 기준을 감안할 때 해당 미군에게 사형이 선고돼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미국 정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기도 했다.

이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A급 전범의 합사(合祀)를 이유로 반발하지만, 이 압력에 굴복해 A급이 분사(分祀)되면 다음은 B, C급 전범의 합사 문제가 외교 카드로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요미우리는 지난해엔 “A급 전범은 일본 국내법으로는 ‘공무로 사망한 사람’”이라는 궤변을 폈다. 또 그 전해에는 “2차대전 당시 동아시아에는 중국과 태국을 빼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식민지밖에 없었다”면서 “일본은 아시아 제국을 침략한 게 아니며, 전쟁은 이들 구미제국의 영토를 침공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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