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이번엔 디지털 거품?

  • 입력 2004년 5월 24일 15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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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계에서는 지난해부터 '디지털 경기'란 말이 부쩍 많이 쓰이고 있다. 디지털 가전 제품이 호경기 국면을 주도하고 있다는 뜻에서다. 고가품이 잘 팔리는 소비 열기 속에 일부에서는 수년 전 'IT거품'을 떠올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신 삼종(三種)의 신기(神器)'=소비 부활에 불을 당긴 주역은 디지털 카메라, DVD 레코더, 고화질 TV 등 디지털 기기. 일본에서는 이 3가지 제품을 '신 삼종의 신기'로 부른다. 삼종의 신기란 천황가에 내려오는 3가지 보물로 황위 계승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빈사 상태의 일본 경제를 살려낸 디지털 기기를 이 같은 보물에 빗대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마쓰시타(松下)전기는 최근 일본 북단 홋카이도(北海道)의 한 소도시에서 신형 디지털카메라 시연회를 가졌다. 예상하지 않던 광경이 벌어졌다. 준비한 카메라 34대가 순식간에 팔린 것. 대도시에서 워낙 먼 곳이라 디지털 붐과 상관없었는지 그간 판매 실적이 영 좋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이유는 이날 디지털카메라와 함께 소개한 DVD 레코더 제품 '디가' 때문이었다. PC를 켜지 않아도 간단히 DVD에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저장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VTR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디지털카메라도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디지털기기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카시오가 9년전 디지털카메라를 내놓으면서부터. 찍은 장면을 바로 확인할 수 있고, PC를 이용해 편집하거나 이메일로 보낼 수 있는 이점 때문에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 판매대수를 능가한 것은 이미 2002년을 넘기면서부터였다.

▽고가라도 좋다= 일본 최대의 전자제품상가인 도쿄(東京) 아키하바라(秋葉原). 이곳에 마쓰시타 산요 샤프 등 일본 기업들의 고화질 TV 300대, DVD 레코더 180대를 동시에 진열해 놓은 대규모 디지털제품 종합 판매장이 작년 말 들어섰다. '안방극장' 개념 아래 오디오를 포함한 가전제품 일체를 세트로 판매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매장 관리인은 "요즘 가장 잘 팔리는 제품은 50만엔(약 500만원)~60만엔(약600만원)짜리"라고 말했다.

도쿄 뿐 아니라 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등 대도시의 TV 판매장도 속속 디지털 제품 인기 속에 대형화하고 있다. 플라즈마 혹은 액정 모니터를 사용한 대형 고화질 TV 구입 붐은 작년 12월 지상파 TV의 디지털화 계획(2011년 완결 예정)에 따라 3대도시 권역에서 고화질 디지털방송이 시작되면서 본격화됐다.

도쿄시내의 한 백화점 종업원 아오키 카오리씨(28)는 "0%에 가까운 초저금리인데 저축을 하면 뭐해요"라면서 "보너스를 타면 디지털제품 종합판매장에 달려간다"며 웃었다.

기업들은 디지털 기기의 기능을 서로 연결시키는 등 새 기능을 덧붙인 고가 제품으로 소비자의 눈과 발을 묶고 있다. DVD 레코더 붐에 따라 소니가 최근 내놓은 'DVD 이용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가 그런 종류다. 주류를 이뤄온 3만~4만엔대의 디지털카메라 곁에 40만엔짜리 신제품이 등장했다. 세탁기, 에어컨, 식기세척기 등도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동안 '공짜는 기본'이었던 휴대전화도 고가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웬만한 디지털카메라 화소 수에 버금가는 카메라가 달린 제품이나 TV시청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중고교생이 들고 다니는 모습도 드물지 않다.

▽새로운 거품(?) =디지털 경기와 무관하지만 다이어트용품, 성형미용, 피부관리 등 여성관련 업종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현상도 흥미롭다. 가계 소비를 좌우하는 일본 여성들의 들뜬 소비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란 분석도 있다.

17일 일본 국세청이 발표한 고액납세자 랭킹에 따르면 1, 2위는 재벌그룹 회장이 아니라 무명에 가까운 건강식품 판매회사 오너들. 4위는 여성용 기능성 팬티 판매회사, 9위는 성형미용 클리닉이 차지하는 등 고액납세자 10명중 4명이 미용, 건강 관련회사 오너들이었다.

건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증가 때문에만 일어난 것일까.

와세다(早稻田)대 야마키 카즈히코(八卷和彦) 교수는 "오랫동안 불황 속에 얼어붙어 있던 여성들의 소비 심리가 건강을 촉매제로 폭발하고 있는 양상"이라면서 전 업종으로 소비가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현재의 '디지털 경기'를 보며 수년 전 단명으로 끝난 'IT 거품'을 연상하는 시각도 의외로 뿌리 깊다.

2월 말 현재 일본의 실업자는 335만명, 실업률은 5.0%로 전월과 거의 비슷한 상태이다. 또 2월 말 현금 금여를 보면 전년 동월 대비 0.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의 호실적이 개인 소득의 증가로는 아직 이어지고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지표로 볼 때 현재 가전제품을 중심으로 한 소비 붐은 소비 심리의 일시적 폭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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