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패배자는 바로 대만 국민"

  • 입력 2004년 3월 26일 14시 05분


25일 오후 5시경 대만 총통부 광장에는 확성기를 통해 장송곡을 연상시키는 비장한 음악이 울려퍼졌다. 온종일 내리는 비를 꼬박 맞으며 격정의 외침을 토해내던 5000여명의시위 군중들의 눈에 점차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들 '하느님, 중화민국을 보호하소서!'라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40여분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너무 침잠된다 싶었던지 행진곡풍의 힘찬 음악으로 바뀌었다. 험난한 국제환경속에서도 굳건히 버텨나가는 대만을 찬양한 '그 누구도 그를 업신여길 수 없어(誰都不能欺負他)'라는 노래였다. '중화민국의 노래(中華民國頌)'라고도 불리는 이 곡이 흘러나오자 군중들은 일제히 따라부르며 손에 든 국기를 좌우로 흔들었다. 카이다거란(凱達格蘭) 광장이 삽시간에 국기 물결에 뒤덮였다.

카이다거란은 '원주민'이라는 뜻의 대만 소수민족 말로 2000년 대만 출신인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자신의 취임을 축하해 총통부 광장의 이름을 바꾼 것. 24일부터 카이다거란 광장은 '민주 광장'으로 불려지고 있다. 광장 입구에는 '민주'라는 거대한 간판이 세워졌고 '톈안먼(天安門) 광장처럼 뜨거운 피로 대만을 구하자'는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민진당의 쉬신량(許信良) 전 주석도 "민주주의 이념을 위해 시위에 동참한다"며 24일 밤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훔치던 여대생 장(張·21)은 "롄잔(連戰)과 쑹추위(宋楚瑜)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대만의 민주와 미래를 위해 투쟁한다"고 목멘 소리로 말했다. 퇴근하자마자 넥타이 차림으로 달려온 선(沈·31)은 "더티 플레이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며 "천수이볜이 물러날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싱가포르 화교인 류(柳·47·여)는 "중국 영국 인도 말레이시아인이 섞여있어도 싱가포르는 서로 단합해 잘 산다"며 "같은 핏줄을 원수로 만들어버린 천수이볜은 자손 대대로 더러운 이름을 남길 것"이라고 비난했다. 퇴역 군인인 린(林·78)은 "천수이볜이 진정으로 국민과 국가를 사랑하는가"라며 "그렇다면 왜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항의하고 고통스러워 하는가"고 반문했다.

4년전 천 총통이 당선됐을 때 선거에 진 국민당 지도부를 겨냥했던 시위와는 달리 이번에는 야당 지지자 뿐만 아니라 젊은 대학생과 회사원, 지식인 등 자발적인 참여자가 많다는 것이 다른 특징이다. 그만큼 천 총통에 대한 불신과 선거에 대한 의혹이 깊다는 반증이다.

시위 현장을 닷새째 취재 중이라는 방송사 기자 류(劉·32)는 지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선거에서 진 것은 롄잔과 쑹추위가 아니라 바로 대만 국민이다."

타이베이=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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