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유전개발 쟁탈전]中-日, 총성없는 ‘에너지 전쟁’

  • 입력 2003년 10월 12일 19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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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이 6월 러시아를 급히 방문했다. 방문지는 모스크바가 아닌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회담 상대는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이 아닌 빅토르 흐리스텐코 경제부총리였다.

가와구치 외상은 “러시아가 시베리아 송유관 노선을 일본에 유리한 극동라인으로 결정해 주면 유전 개발과 송유관 건설을 위해 50억달러를 지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5월 모스크바를 방문, 중국노선을 위해 17억달러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다급해진 일본이 가와구치 외상을 보내 더 큰 카드를 러시아에 내민 것이다.

당초 중국의 구상으로 시작돼 2005년이면 석유 도입이 시작될 예정이었던 시베리아송유관 건설 사업은 뒤늦게 뛰어든 일본 때문에 대혼란에 빠졌다. 아직까지 노선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일본과 중국의 저돌적인 구애로 ‘행복한 고민’에 빠진 러시아는 두 노선을 절충한 Y자 노선이라는 대안을 내놓았지만 해법은 쉽지 않다. 한정된 매장량을 감안할 때 두 나라가 나눠서 공급받는 것보다는 독차지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1993년 석유 수입국으로 전락해 석유 수입의 80%를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 역시 일본도 중동에 대한 석유 수입의존도가 88%에 달해 시베리아 원유는 이들에게 ‘오아시스’나 마찬가지다.

동북아 국가의 에너지 확보 경쟁이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릴 만큼 치열해지고 있다.

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북아 지역의 안정적인 에너지 확보를 위해 국제협력을 논의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세계 최대 가스 생산업체인 러시아의 가스프롬과 세계적인 에너지 메이저인 로열 더치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한국가스공사 등 업계와 학계 연구소 등에서 온 국내외 관계자들이 모였다.

김명남(金明男) 한국가스공사 대외사업실장은 “동북아 국가간 갈등이 에너지 협력의 장애”라고 지적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상곤(李相곤) 원장은 “동북아 지역의 에너지 협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면서 에너지 개발을 둘러싼 리더십 싸움을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국제에너지 자본들도 러시아의 에너지시장 쟁탈전에 가세하고 있다. 엑손모빌은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인 유코스의 지분 40∼50% 인수를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은 “유코스가 이미 올해 상반기에 러시아 4위 업체인 시브네프티를 합병해 몸집을 불렸기 때문에 엑손모빌이 유코스 지분 인수에 성공하면 세계 최대 에너지 메이저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 BP도 러시아 3위의 정유사 TNK와 합병해 BP-TNK를 탄생시켰다.

BP-TNK는 한국이 러시아 중국과 함께 추진 중인 코빅타 가스전 개발 사업의 주관사인 로시아페트롤리엄(RP)의 대주주다. 유코스는 중국과 일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시베리아 유전의 사업자.

만일 일본이 원하는 대로 시베리아송유관이 극동 나홋카로 연결될 경우 한국도 시베리아 원유 도입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한국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 에너지 메이저들의 급박한 움직임과 결코 무관하지 않게 된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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