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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3월 23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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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17일 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으로 이렇게 연설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아들은 비슷한 표정을 짓고 “후세인에게 기회를 줄 만큼 줬다”며 전쟁을 선언했다.
미국의 부시 전, 현 대통령 부자는 모두 재선을 한 해 앞두고 불황에 시달리는 시기에, 같은 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됐다. 그 때문에 이번 이라크 전쟁을 ‘걸프전 속편’으로 보기도 하지만 12년 전과 차이도 크다.
▽전쟁 발발 과정=아버지는 유엔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고 아들은 실패했다. 걸프전의 계기는 1990년 8월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번 전쟁은 ‘9·11테러의 배후인 알 카에다를 후원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온’ 후세인 대통령에 대한 응징이 명분이다.
걸프전 때는 28개국이 유엔 깃발 아래 연합군을 구성했다. 이번에는 미국 영국군 외에 호주와 폴란드 등이 소수의 병력 파견 의사를 밝힌 정도다.
반면 미국내 지지는 아버지보다 아들이 더 높다. 걸프전 때는 미국 상원 52 대 47, 하원 250 대 183으로 전쟁을 승인했으나 지난해 10월에는 각각 77 대 23, 296 대 133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때문에 아버지는 전쟁에 이기고도 재선에 실패했지만 아들은 정치적 승리를 거두리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쟁 양상=걸프전때 미군은 5주일이 넘게 공습을 계속한 뒤 지상군을 투입, 100여시간 만에 전쟁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번에 미군은 개전초기에 걸프전의 10배에 달하는 미사일과 폭탄을 퍼붓고 곧바로 지상군을 투입했다.
걸프전 당시 이라크 정규군은 95만5000명. 현재는 37만∼43만명 수준으로 파악된다. 반면 미군의 전력은 “걸프전은 석기시대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향상됐다.
과거에는 이라크 민간인 사망이 이라크 주장으로는 5만여명, 미국측 집계로는 3000여명에 달했다. 이번엔 목표물을 꼭 집어 폭격하는 정밀공습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극히 적을 것이라고 미군측이 주장한다. 정밀 유도 폭탄의 비중이 7%에서 80%로 늘었기 때문이라는 것.
▽경제적 상황=걸프전을 전후해 주요 주가 지수들이 약 20%씩 상승했다. 이번에도 다우지수가 열흘 사이 13%나 뛰었다.
그러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지금은 걸프전 때와 상황이 판이하다”고 지적했다. 91년과 달리 베네수엘라의 석유생산량이 두 달간의 파업 후유증에서 회복되지 않았고 미국의 석유 비축분도 75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주가도 걸프전 당시는 워낙 저평가된 상태였지만, 이번에는 이미 낙관론이 주가에 많이 반영됐기 때문에 돌출변수가 나오면 오히려 증시는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 걸프전과 이라크전 비교 | ||
| 걸프전 | 이라크전 | |
| 작전명 |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 이라크의 자유(Iraqi Freedom) |
| 미국 사령관 | 노먼 슈워츠코프 | 토미 프랭크스 |
| 미국측 동원 병력 | 다국적 연합군 80만명 | 미영 연합군 38만명 |
| 이라크 정규 병력 | 95만5000명 | 37만∼43만명 |
| 전비(戰費) | 760억달러(미국 부담은 127억달러에 불과) | 최대 950억달러(대부분 미국과 영국이 부담해야 할 것으로 보임) |
| 투입폭탄중 정밀유도(스마트)폭탄 비중 | 7% | 80% |
| 유엔의 지지 | 받음 | 못 받음 |
| 전쟁 명분 |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쿠웨이트 해방이 명시적 목표) | 이라크의 테러세력 지원과 대량 살상무기 개발(후세인 정권의 전복이 명시적 목표) |
| 전략 | 5주간 공습 후 지상군 투입 | 개전 초기 막대한 폭탄을 퍼부은 뒤, 바로 지상군 투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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