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국 리더십 집중분석-미국]국가적 혼란 어떻게 푸나

  • 입력 2001년 8월 12일 18시 37분


《한국사회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정부의 대북정책 등 전국적인 이슈에서부터 비교적 사소한 인천국제공항 휴지 개발 사업자 선정 의혹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잘못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혼란이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우리 사회에는 과연 문제를 풀어나갈 책임 있는 지도자나 지도층이 있는 것인지 국민의 불신은 깊어만 간다. 한국보다 나라가 크고 사회가 복잡한 주요 외국은 어떻게 국가적 혼란을 해결할까. 국가가 혼란에 빠질 때 지도자들은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고, 이해관계가 다른 국민을 납득시키는 원칙은 무엇일까.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일본의 리더십을 시리즈로 분석해본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은 4일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변호사협회 연례 총회에서 지난해 11월 대통령 선거의 승자를 가린 대법원 판결을 이렇게 평가했다.

“승자는 물론 패자도 판결에 승복하고 그에 따라 미국민 모두가 선거결과를 인정하게 됐다는 점에서 당시 대법원 판결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브레이어 대법관은 지난 대선의 최대 쟁점이었던 플로리다주 수작업 재검표 문제에 대해 대법원이 12월13일 5대 4의 판결로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 그의 당선을 확정지을 때 소수의견을 냈다. 당시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플로리다주 정부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판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효처리한 표들에 대한 수작업 재검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권자들의 표심(票心)을 확인하지 않으려는 처사라며 비난했다.

▼연재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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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여가 지난 뒤 재검표를 주장했던 브레이어 대법관이 인식의 변화를 보인 것은 미국의 ‘법치(rule of law)’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반영한 것이라고 미국 언론은 분석했다.

사법부의 판결을 모두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미국은 대선 실시 후 36일간 승자가 가려지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빚어진 심각한 국론 분열의 후유증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다.

특히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패배를 인정하며 국민에게 화합을 촉구한 것은 감동적인 페어 플레이(fair play)였다.

“나는 대법원의 판결에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이를 수용하겠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실망을 극복해야 한다. 미국 민주주의의 힘은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난관을 통해 분명히 확인된다. 이것이 미국이다. 우리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일단 결과가 나온만큼 화합해야 한다.”

너무도 미국적인 고어의 패배 인정은 워싱턴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과 한국 외교관들 사이에서 한동안 화제가 됐다. 많은 한국인들이 “만일 대선에서 한달여 동안 당선자가 가려지지 않다가 대법원 판결로 대통령이 결정되는 상황이 한국에서 발생한다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까”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미국의 저력을 부러워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더욱 빛을 발휘하는 미국의 법치주의 전통은 물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법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고, 법을 통해 공동체를 운영하겠다는 국민적 합의가 200여년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국은 오늘날 전세계가 부러워하는 법치국가가 될 수 있었다.

70년대 리처드 닉슨 전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려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이 주도했던 60년대 인권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법의 테두리 내에서 비폭력 시위를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법치주의 외에 리더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리더십을 강조하는 전통도 미국의 강점으로 꼽힌다.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올바른 리더십을 중요한 사회적 덕목으로 강조해서 가르친다. 한국처럼 학급에 반장은 없지만 많은 학생들이 특별활동 등을 할 때 돌아가면서 리더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군대에서도 분대장(squad leader) 소대장(platoon leader) 등에겐 계급에 따른 직함 대신 리더라는 명칭이 부여된다.

미국의 리더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일 뿐 군림하지 않는다. 어떤 조직에서든 리더가 조직원보다 우월하다고 허세를 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통령도 여러 리더 중 한 사람일 뿐 절대적 통치자는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워싱턴 한국경제연구소의 피터 벡 국장은 “법치주의와 올바른 리더십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립된 미국에선 누가 대통령이 되든 큰 상관이 없다”며 “이런 점에서 미국은 인치(人治)가 강조되는 한국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말했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

▼E J 디온 주니어박사가 말하는 미국의 리더십▼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E J 디온 주니어 박사는 선거와 여론 등의 주제를 깊이 다루는 전문가이다. 워싱턴포스트지의 저명한 칼럼니스트이고 한 그로부터 미국의 리더십에 관한 견해를 들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사실상 연방대법원 판결에 의해 당선됐다.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수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법치주의에 대한 존중과 현실적인 정치판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고어 후보와 민주당은 대법원 판결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이미 유권해석이 내려진 만큼 더 이상의 이의 제기는 비생산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여론은 당파싸움은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쪽이었다. 또 대선 패배가 집권능력 결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4년 뒤를 기약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대선 만큼 치열했던 1824년과 1876년 대선에서 패자가 그 다음 선거에서 승리한 역사적 사실도 고려했을 것 같다.”

-누가 미국을 이끈다고 할 수 있나.

“대통령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으나 미국에선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분립과 법치주의가 확립돼 있는 만큼 대통령이 혼자서 통치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국민도 권력의 분립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에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수용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상황이 달랐을 텐데….

“미국에서도 대법원 판결에 반대가 많았던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국민은 물론 대법원 내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대법원이 대통령을 결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 장기적으로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미국에는 선거결과와 리더를 존중하는 전통이 강한 것 같다.

“정당하게 선출된 리더를 국민이 존중하는 것 못지 않게 리더에 대해 강력한 비판과 견제를 하는 것이 미국의 일관된 전통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로널드 레이건처럼 강력한 대통령이 통치했을 때일수록 그에 대한 의회의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강력한 야당은 미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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