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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7월 23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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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신임 인도네시아 대통령(54)에게는 ‘국부(國父) 수카르노의 딸’이라는 호칭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운동을 이끈 뒤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수카르노가 바로 그의 아버지이기 때문. ‘수카르노푸트리’라는 말도 ‘수카르노의 딸’이라는 뜻이다. 이제 반세기 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딸이 혼란의 인도네시아를 이끌게 됐다.
그가 정치에 눈을 뜬 것은 1983년 민주당(PDI)의 자카르타 지부장으로 일하면서부터. 그가 입당한 뒤 82년 총선에서 지지율 6%에 불과했던 PDI는 87년 총선에서 11%, 92년에는 15%로 당세가 급신장했다. 이를 발판 삼아 93년 당총재가 된데 이어 95년 4월 PDI의 ‘98년 대선후보’로 뽑혀 수하르토 정권 아래서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30년 동안 철권통치를 해온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98년 5월 물러난 뒤 다음해 6월 치러진 총선에서 메가와티 여사의 민주투쟁당(PDIP)은 34%의 지지로 원내 제1당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그는 그해 10월 여당 후보가 빠진 채 치러진 국민협의회(MPR) 대선에서 압두라만 와히드 국민각성당(PKB) 후보에게 고배를 마신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1000만명의 세계 최대 이슬람교국. 범이슬람권과 구여당인 골카르당, 군부로 대표되는 MPR 내 기득권층이 기독교와 화교, 민주화 세력에 바탕을 둔 메가와티 여사의 대통령 선출에 불만을 가졌던 것. 그러나 메가와티 여사는 곧바로 부통령직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와히드 대통령의 국정파트너가 됨과 동시에 차기 대권을 예약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반둥대 재학시절부터 민족학생운동에 가담하는 등 아버지의 투사적 기질을 쏙 빼닮았다는 평가가 많다. 보기와는 달리 카리스마가 있고 결정적인 고비에서 기다릴 줄 아는 정치적 감각도 갖췄다는 것. 반면 단순하고 과감하지 못해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은 모자라며 선친의 후광에 의존한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토론을 싫어하고 언론을 기피해 지도자로서의 이미지 부각에 실패했다는 혹평도 나돈다.
곧 출범할 메가와티 체제는 일단 가시밭길을 걸을 전망이다. 와히드 전 대통령의 지지세력인 이슬람교도들의 저항과 급속히 나빠지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경제가 그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종훈기자>taylor55@donga.com
▼와히드/부패-무능으로 몰락▼
국민협의회(MPR)의 탄핵으로 23일 권좌에서 물러난 압두라만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21개월 전 취임 당시만 해도 ‘청렴결백한 국가지도자’란 평가를 받았다.
32년에 걸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철권통치’와 ‘부정부패’에 지친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1999년 10월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새로운 희망’ 그 자체였다.
뇌일혈로 시력을 잃은 한 쪽 눈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농담을 즐기는 성격, 건강상의 문제 등을 이유로 일부에서 자질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으나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부정축재한 재산을 환수하고 인권유린의 진상을 규명하면서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독재의 그림자를 청산했다. 1998년 폭동 때 해외로 빠져나간 화교자본도 다시 유치했다.
여세를 몰아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보좌관 출신으로 동티모르 학살을 주도한 위란토 정치안보 장관을 해임하는 결단을 내리자 국민은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자바섬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와히드 전 대통령은 젊은 시절 이집트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1984년 그는 할아버지가 창설한 회원 4000만명의 이슬람단체 나들라툴 울라마(NU)의 의장에 취임해 대통령이 되기까지 15년간 이 단체를 이끌었다. 자바섬에서의 농민운동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계에 진출했으며 나중에 자신이 부통령으로 임명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러나 지난해 5월 브루나이 국왕이 기부한 200만달러를 유용하고 자신의 전용안마사가 조달청 자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에 대한 기대와 찬사는 의구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국회가 부패 혐의를 조사하려고 해명을 요구했으나 그가 답변을 거부하거나 무성의한 답변을 내놓으면서 결국 ‘MPR에 의한 탄핵’이라는 막다른 골목까지 오게 됐다.
가장 큰 타격은 한때 다정한 오누이 같다던 메가와티 부통령이 등을 돌린 것. 와히드 대통령은 ‘권력분점’과 ‘비상사태 선포’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반대파를 달래고 위협했으나 최후의 보루인 군과 경찰마저 등을 돌리는 바람에 결국 권좌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백경학기자>stern10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