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어디로 가나]국정공백 장기화

  • 입력 2001년 4월 23일 18시 34분


측근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통령궁을 나서고 있는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가운데)
측근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통령궁을 나서고
있는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가운데)
“우리는 이미 지쳤다. 1998년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날 때만 해도 뭔가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지만 부정부패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다. 인도네시아의 미래는 너무나 어둡다.”

2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시내에서 만난 한 회사원(42)은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국이 파국을 향해 치달으면서 온국민이 고통받고 있는 데도 정치인들은 이해관계에 얽매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격분했다.

인도네시아는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의 부정스캔들에서 비롯된 정치공백으로 인해 이미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부문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 와히드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각성당(PKB)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이 모두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면서 대통령 지지세력과 반대세력간의 대립이 날로 격화되고 있다.

▼연재순서▼

- (上)혼란한 정국
- (中)국민 정치혐오증 확산
- (下)경제 위기감 고조

와히드 대통령은 99년 취임 이후 수하르토 전 대통령 등 구 세력 처벌과 부정부패 청산을 추진해 왔지만 이른바 ‘브루나이 게이트’와 ‘블록 게이트’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탄핵 대상으로 지목됐다. 브루나이 게이트는 브루나이 국왕이 와히드 대통령에게 아체 지역의 민족사업을 위해 사용하라며 전달한 200만달러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의혹. 또 블록게이트는 대통령의 전속마사지사가 조달청의 후생복지자금 중 350억루피아(약 43억원)를 빼 쓴 사건으로 정치권에서는 와히드 대통령이 연루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부통령이 이끄는 최대 정당인 투쟁민주당(PDIP)과 구 여당인 골카르당, 국민수권당(PAN) 등은 2월 1일 와히드 대통령에게 스캔들과 관련한 1차 해명요구서를 발부한데 이어 30일 2차 해명요구서 발부를 논의할 계획으로 있다.

와히드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각성당(PKB)는 국회 500석 중 20석에 불과한 소수 정당. 국회가 2차 해명요구서를 발부한 뒤 6월 중 국민협의회(상원으로 국가최고기관) 특별회의를 열어 탄핵을 강행할 경우 와히드 대통령의 불명예퇴진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러나 와히드 대통령은 자신이 이끄는 최대 이슬람단체 나들라툴 울라마(NU·회원 4000만명)의 지지를 배경으로 사임을 거부하고 있다.

와히드 대통령의 사임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지만 일반 국민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시사주간지 가르타 기자인 드위트리 왈루요(36)는 “정치권은 와히드의 부패만 문제삼고 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부패에 연루돼 있다”며 “현재 인도네시아의 불행은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할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면서 군사정권으로의 회귀 가능성도 일부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태가 유혈충돌로 번질 경우 군부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수습이 어렵기 때문. 특히 혼란을 틈타 아체 등 각 지역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분쟁이 잇따르자 강력한 군사력으로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메가와티, 와히드비난 자제▼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부통령은 초대 대통령을 지낸 수카르노의 장녀. 1999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최대 정당 투쟁민주당(PDIP)을 이끌고 있어 정치적 기반이 탄탄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압두라만 와히드 대통령을 몰아내고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와히드 대통령에 대해 직접적인 비난도, 지지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뭘까.

우선 현 상황에선 누가 정권을 잡아도 단시간 내에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섣불리 정권을 잡았다가는 과거 청산을 제대로 못한 책임과 부정스캔들 등에 휘말려 또다시 정치권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여성 대통령’에 반대하는 나머지 정당 연합에 의해 와히드에게 대통령직을 빼앗겼던 만큼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다.

또 지금 당장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제 1당의 최고 지도자와 부통령으로서 사실상 대통령에 맞먹는 실권을 인정받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통령 임기를 마친 뒤 다음 총선을 통해 대통령이 돼도 늦지 않다는 것. 그는 지금 자신이 적극 나서 현 정국을 타개하기보다는 혼란이 정리된 시점에서 ‘정통성 있는’ 대통령으로 추대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자카르타〓이영이특파원>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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