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교수의 쿠바기행]외세잔해-'혁명'의 숨결 한곳에

  • 입력 2000년 11월 19일 19시 00분


《혁명가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사탕수수, 럼주,살사음악, 시가로 유명한 중남미의 섬나라 쿠바.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UCLA 교환교수로 근무하면서 본지에 칼럼 ‘LA 리포트’를 쓰고 있는 서강대 손호철교수(정치학)가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 4박5일 동안 북한과 더불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를 방문, 게바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혁명역사의 현장과 변화의 모습을 둘러봤다. 손교수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멕시코의 멕시코시티를 거쳐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들어갔다. 손교수의 쿠바 기행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시가, 사탕수수, 럼주, 그리고 살사(salsa)음악의 나라.’

멕시코시티를 떠나 쿠바를 향해 카리브해 위를 나는 비행기에서 문득 떠오른 것은 북한과 쿠바와의 색다른 공통점이었다. 그것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는 사실이다. 즉 지척에 놓인 북한을 가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중국을 돌아 먼 길을 가야하듯이 미국의 마이매미에서 8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쿠바를 미국에서 가려면 멕시코나 캐나다로 돌아가야 한다. ‘미국의 환락의 섬’에서 혁명 이후 ‘미국의 코잔등의 종기’로 변해버린 쿠바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경제제재 때문이다.

아바나공항에 내린 뒤 입국수속은 우리와 정식 외교관계가 없는 사회주의 국가치고는 의외로 간단하게 끝났다. 호텔에 짐을 풀고 구(舊)아바나시에서로 향해 가는 도로 왼쪽으로는 카리브해가 넘실대며 방파제를 매섭게 때려대고 있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콜럼버스의 옛 자택.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사실 신대륙이 아니라 그 앞의 작은 섬 쿠바였고 그는 “인간의 눈으로 본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감탄했다. 전형적인 스페인풍의 2층 저택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잘 보전돼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꿔 놓은 콜럼버스의 미주 정복은 5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미국의 경우 콜럼버스의 날 기념행사가 자신들의 오랜 전통에 대한 모독이라는 인디언들의 거센 항의로 몇년째 열리지 못하는 등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콜럼버스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노상의 서점들을 지나자 옛 스페인 총독관저가 나타났다. 특이한 것은 그 앞의 도로. 흙 위에 나무를 깐 세계 유일의 나무도로다. 총독이 낮잠을 잘 때 발소리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긴 것이라니 식민주의의 오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것이 하바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옛 의회 건물이다. 미국 의사당 모양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 워싱턴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껴졌다. 그와 함께 사실상 미국의 예속국이었던 옛 쿠바의 현실을 잘 상징하고 있다는 느낌과, 건물만 빌려 왔지 독재만 하다가 혁명에 의해 무너진 역사가 말해주듯이 정신은 옮겨오지 못했다는 느낌도 들었다.

택시를 세워 오다가 본 거대한 성곽으로 향했다. 18세기 말 영국이 쿠바를 점령하자 교역의 중심지를 잃은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영국에 주고 다시 되찾은 뒤에 지었다는 미주 최대의 성곽이었다. 포대는 한참 보수중이었는데 그 돈을 스페인 정부가 댄다니 자신들의 지배의 역사를 보전하려는 생각일 것이다.

신(新)아바나로 들어가자 나타난 것은 쿠바의 붉은 광장이라고 할 수 있는 혁명광장. 거대한 탑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흰 대리석상 조각이 눈을 사로잡았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의 대리석상과 기념관이었다. 근대 스페인 문학의 효시라는 평을 듣는 호세 마르티는 뛰어난 문필가이자 혁명가로서 일생을 쿠바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자신이 조직한 제2차 쿠바 독립전쟁에 참가해 1895년 첫 전투에서 사망한 전설적 인물. 그의 이름을 아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이 그의 시를 알고 있다. 귀에 익은 ‘관따라메라’라는 노래가 바로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140m 높이의 탑은 카스트로가 대학시절 바티스타 독재에 대한 혁명을 위해 군부대를 습격했다 체포돼 유배됐던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섬의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시된 스페인 식민통치와 독립운동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관람하고 탑 위에 오르자 아바나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기념관 건너편에는 아바나시 최고의 관광명소인 내무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내무부가 관광명소라니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그 이유는 한 때 이곳에 근무했던 전설적인 혁명가 게바라의 초대형 초상이 네온으로 형상화돼 외벽에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네온에 조명이 들어오는 밤에는 매우 아름답다. 대학생 기분으로 돌아가 기념품으로 산 게바라 티셔츠와 붉은 별이 달린 검은 베레모를 쓰고 기념촬영을 하자 옆에서 사진을 찍던 유럽 관광객들이 엄지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멋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골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4박5일이라는 짧은 일정에서 하루를 내어 아바나에서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있는 해변휴양지 바라데로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질이 매우 나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생산은 되는 석유 시추기들, 5년간 직접 건설에 참여해 노동하면 입주권을 주는 방식으로 건설한 대형 아파트단지 등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 있고 노란 자켓을 입은 사람이 그 속에 끼어 있는 광경이었다. 교통사정이 나빠 교통부 직원들이 지나가는 차를 세워 같은 방향의 사람을 태워주도록 하는 강제 카풀제였다.

과거 마피아들이 해변가에 호텔을 세워 카지노를 운영하던 바라데로는 알 카포네의 별장이 있었을 정도로 미국갱의 영향이 강했던 곳이다. 관광명소가 된 미국의 재벌 듀퐁의 옛 별장에 들어가자 18홀의 개인 골프장이 시선을 압도하며 미국 재벌의 부와 쿠바에 대해 가졌던 미국의 영향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날 아바나시의 혁명박물관을 찾았다. 이 건물은 바티스타 시절 대통령 관저로 쓰이던 곳으로 영화 ‘대부 속편’과 로버트 레드포트 주연의 ‘아바나’에서 혁명군에 밀려 바티스타가 도주하는 장면에 나와 더욱 유명해졌다. 박물관에는 바티스타 시절의 고문도구를 비롯해 쿠바혁명의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인상적인 것이 두가지 였다.

하나는 혁명 후의 미국기업 국유화를 보여주는 전시실로 웨스팅하우스 등 국유화한 굴지의 기업 현판들을 떼어다가 진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그만 침공 등 쿠바혁명정부 타도를 위한 미국의 1960년대 침공작전에서 노획한 구명정 등이었다.

그러나 하이라이트는 역시 의사 출신인 게바라가 게릴라 시절 사용했던 치과도구에서부터 총기에 이르는 여러 유물과 그의 유골이 든 검은 관이 있는 게바라실.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다 1967년 사살된 게바라의 유골을 볼리비아는 얼마 전 쿠바에 보내줬다.

검은 색의 관에 선명하게 쓰여진 ‘Che’라는 글씨를 바라보면서 소련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그가 국적을 넘어 그토록 투쟁한 혁명의 실패에 대해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마치 대답처럼 느껴지는 게바라 특유의 신비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쿠바 기본 지표 ■

면적11만860㎢
인구1109만6395명(99년)
수도아바나(인구 200만명)
언어스페인어
종교가톨릭
민족혼혈(물라토·51%) 백인(37%) 흑인(11%)
국가원수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 겸 대통령
정부형태국가사회주의
정당쿠바공산당
국내총생산(GDP)173억달러(98년)
1인당GDP1560달러(98년)
통화페소, 1달러=1페소(99년)
기후아열대성 해안기후
연평균기온섭씨 25.5도

■ 쿠바 약사 ■

△1511년=스페인령에 편입
△1902년=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독립
△1933∼59년=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 집권
△1959년 1월=피델 카스트로, 혁명정부 수립
△1961년 1월=카스트로, 사회주의 노선 선언. 미국과 단교
△1976년 12월=카스트로, 국가평의회의장에 피선
△1993년 7월=쿠바 주둔 소련군 완전 철수
△1999년 1월=미국, 쿠바인과의 접촉 확대
△1999년 9월=쿠바 야당연합세력,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촉구
△1999년 11월=유엔총회, 미국의 대쿠바 경제 제재 철회 요구

▼체 게바라 "죽어서도 경제 버팀목"▼

죽어서도 쿠바를 살리는 체 게바라

레닌, 마오쩌둥(毛澤東), 호치민(湖志明) 등 열거하려면 끝이 없는 20세기의 많은 혁명가들 가운데 체 게바라처럼 카리스마와 마력을 가진 혁명가는 없다.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소련과 동구의 몰락 이후 그 평가가 급하강하고 있지만 게바라만은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게바라 전기가 출판돼 큰 인기를 누린 바 있다.

이는 신비에 싸인 눈빛에 턱수염으로 특징지어지는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긴 그의 얼굴에도 기인하지만 승리한 뒤 현실정치에 오염돼야 했던 많은 혁명가들과는 달리 끝까지 이상을 찾아 투쟁하다 젊은 나이에 사살된 그의 극적인 삶과 이상주의, 로맨티시즘에도 빚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의대생으로 남미 자전거여행에서 비참한 현실을 보고 사회의식을 갖게 되고 의사가 된 뒤에도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쿠바혁명에 앞장선 그의 삶은 한 편의 영화 그 자체다. 만성적인 천식환자로 어려운 게릴라전을 이끌어간 것으로부터 혁명에 성공한 뒤 산업부장관, 중앙은행장 등의 요직을 버리고 어느날 갑자기 세계혁명을 위해 쿠바 국적을 반납하고 아프리카 앙골라의 게릴라전을 돕기 위해 떠나는가 하면 결국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벌리다 생포돼 사살된 그의 죽음에 이르는 그의 일생은 이념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을 매료시켜 왔다.

이번 쿠바여행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게바라는 죽어서도 쿠바를 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쿠바의 어디를 가도 중요한 관광상품은 게바라였기 때문이다. 게바라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는 말할 것도 없고 붉은 별이 달린 검은 베레모, 한국의 골프광들이 좋아할 골프채를 들고 그린에 선 게바라 등 다양한 엽서와 사진포스터들, 이를 이용한 달력, 그의 초상이 새겨진 열쇠고리, 그의 얼굴과 글씨를 새긴 목각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온통 게바라 투성이었다. 한 마디로 게바라가 없었다면 무엇으로 관광상품을 만들어 팔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결국 게바라는 죽어서도 외화벌이를 통해 쿠바혁명을 돕고 있는 셈이다.

(손호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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