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로비실태]美 로비스트 2만여명 합법적 활동

  • 입력 2000년 5월 11일 19시 29분


‘린다 김 사건’과 ‘경부 고속철 로비설’이 불거지면서 로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로비의 역사가 긴 선진국에서는 어떻게 로비가 이루어지고 있을까. ‘필요 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로비에 대한 규제책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처럼 법률을 제정해 로비를 법 테두리 안에 묶어 두려는 나라도 있고 프랑스처럼 관행적으로 로비를 묵인하는 나라도 있다. 일본은 ‘요정로비’라는 말이 일상화될 정도로 로비의 폐해가 크고 깊다.

▼ 미국

미국의 모든 입법 활동 및 정책결정 과정에는 항상 로비가 작용한다. 수많은 이익단체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과 정책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회나 행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인다. 이 같은 로비 자체는 합법이다. 뇌물과 각종 향응을 앞세운 한국식 로비는 통하지 않는다. 법이 로비의 투명성을 엄정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반하면 5만달러 이하의 무거운 벌금이 따른다.

미국은 1995년 로비공개법을 채택해 1996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법에 따라 자기 시간의 20% 이상을 로비활동을 위해 사용하고 6개월간 5000달러 이상을 받는 로비스트와 이들을 고용하는 로비회사는 의회에 등록을 하고 매년 2월과 8월 2차례 6개월 단위로 로비 활동 내용을 신고해야 한다. 여기에는 로비스트와 로비 의뢰인에 대한 정보는 물론 로비를 위해 누구를 만나 얼마를 썼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해야 한다.

쉽게 로비 대상이 될 수 있는 의원들의 경우 로비스트로부터 원칙적으로 향응을 제공받지 못하도록 규정돼 있다. 상원의원은 연간 100달러(한번에 50달러)미만의 선물을 받을 수 있으나 하원 의원은 일절 받지 못한다. 식사는 25명 이상이 참석하는 단체회식과 패스트푸드는 허용되지만 풀코스의 식사는 금지된다.

이 같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로비산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1998년 워싱턴에서 사용된 로비 금액은 무려 14억2000만달러(약 1조5620억원)로 추정된다. 등록된 로비스트는 지난해 2만513명이나 됐다.

로비스트 가운데는 정치인 관료 출신과 변호사들이 많다. 조지 미첼 전 민주당 상원원내총무를 포함해 현재 로비스트로 등록돼 있는 전직 의원만 138명이나 된다. 1993년과 1994년에는 공화당의 윌리스 그래디슨 의원과 민주당의 글렌 잉글리시 의원이 임기 도중 로비스트가 되기 위해 하원을 떠난 일까지 있다.

거물 정치인과 관료 출신 중에는 로비스트로 정식 등록하지 않은 채 실질적으로는 로비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재계에선 전직 관료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하기도 한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밥 돌 전상원의원은 로비스트로는 등록하지 않았지만 워싱턴에 있는 한 로비회사의 자문역으로 일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로비스트 자체보다는 업계와 관계의 구분을 흐리는 ‘회전문(revolving door)’ 현상이다. 지난해 9월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이 미 최대 금융회사인 트래블러스 그룹의 공동 회장으로 영입된 것이 대표적 사례. 그는 공직에 취임하기 전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의 사장으로 있다가 관직을 거쳐 다시 월가로 돌아갔다.

지난해 11월 미 의회가 은행 증권 보험 겸업 금지 조항을 폐지해 월가의 숙원을 해결해줬을 때 미 언론은 금융업계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게 된 루빈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우려했다. 루빈이 트래블러스 그룹으로부터 받는 3년간은 연봉은 1000만 달러가 넘는다.

거액의 정치자금 기부는 또 다른 형태의 로비다. 독점금지법 위반 판결을 받은 마이크로소프트(MS)가 공화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하면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텍사스주지사가 대통령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 가장 최근의 사례. 미국에서도 불법 로비 사건이 종종 터진다.

린다 김 사건과 유사한 경우도 있다. 수십억 달러를 주무르는 하원 교통사회간접자본위원회의 버드 셔스터 위원장은 지난해 4년 동안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있던 여성 앤 애퍼드가 이 위원회를 담당하는 업계의 로비스트로 변신한 뒤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는지 여부로 도마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성적인 호의(sexual favor)’도 뇌물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 셔스터가 특혜를 베풀었다는 물증이 없어 이 사건은 유야무야됐다.애퍼드 자신은 지난해 11월 셔스터의 비서실장 재임시 1만5000달러의 뇌물을 받은 다른 혐의로 유죄가 인정돼 500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미국 대법원은 지난해 4월 공직자에 대한 뇌물죄 적용에 관한 새 판례를 남겼다. 식품회사인 타이슨스 푸드로부터 3만5000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마이크 에스피 전 농무장관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 대법원은 에스피가 농무부 관련 업체로부터 금품은 받았지만 대가성이 없어 뇌물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공직자 업무의 포괄적인 관련성을 인정하고 있는 한국의 법 논리와 다르다. 반면 미 대법원은 돈을 건넨 타이슨스의 간부들에 대해서는 불법적인 로비를 시도한 혐의로 유죄를 확정했다. 돈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돈을 준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판결이었다.

<홍은택기자·워싱턴〓한기흥특파원>euntack@donga.com

▼프랑스

프랑스는 선진국 가운데서 뇌물 수수나 로비스트의 활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하다.실제로 독일 베를린에 있는 국제 투명성기구가 779명의 국제적 기업가를 대상으로 해외에서 받는 뇌물관행지수를 조사한 결과 프랑스는 조사 대상 19개국 가운데 13위를 차지, 뇌물 수수가 어느 정도 관행화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에는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로비스트 등록법이 따로 없다. 외국에서 사법적인 문제를 일으켰더라도 국내 형법이나 형사소송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로비스트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프랑스 정부 방침이었다. 대부분이 국영인 프랑스의 군수 항공산업 분야 대기업들은 외국을 대상으로 한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관례적으로 로비스트를 고용, 계약 규모의 1∼2%를 수수료나 활동 자금으로 지불한다.

르몽드지 자료에 따르면 미라주전투기와 미스트랄 미사일 등 첨단 무기 판매를 성사시켰을 경우 로비스트와 계약 상대자에게 8∼9%의 많은 커미션을 지급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89년부터 기업이 해외무역에서 지불한 커미션 내용을 재무장관에게 통보하도록 했지만 대부분 국방 기밀이란 이유로 공개되지 않는다. 프랑스는 한때 해외 뇌물 비용에 대한 세금까지 공제해 주기도 했다.

프랑스의 ‘뇌물 마케팅’은 프랑스 석유화학그룹 엘프아키텐의 로비스트이자 프랑수아 미테랑 전대통령 시절 두 차례 외무장관을 지낸 롤랑 뒤마 전 헌법위원장의 애인이던 크리스틴 드비에 종쿠르가98년 ‘공화국의 창녀’란 자서전을 발간하면서 적나라하게 세상에 알려졌다.

89년 엘프사는 톰슨이 제작한 프리깃함 6척을 척당 27억프랑(약 7020억원)에 대만에 판매하려고 했으나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한 뒤마 당시 외무장관이 반대했다. 이에 엘프는 종쿠르를 로비스트로 고용, 뒤마를 설득시켜 끝내 거래를 성사시키는데 성공했다. 종쿠르는 그 대가로 엘프로부터 5900만프랑(약 153억원)의 커미션을 챙겼고 뒤마도 종쿠르의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를 통해 많은 사례금(1억여원)을 받았다. 사회 재산 은닉 및 공모 혐의로 종쿠르는 구속됐고 뒤마는 조사위원회에 회부된 뒤 헌법위원장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14일 프랑스 의회가 외국 공무원 부패 규제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에 따라 프랑스의 뇌물 마케팅에 제동이 걸렸다. 새 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뇌물방지 협정을 국내법에 반영, 프랑스 기업들이 국제 무역 거래에서 외국공무원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특히 군수 항공산업 분야의 대형 계약과 관련, 외국 공무원에게 음성적으로 커미션을 제공할 경우 징역 10년형 및 100만 프랑의 벌금형을 선고하고 공민권 박탈 등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했다.

<파리〓김세원특파원>claire@donga.com

▼일본

일본에는 로비 활동을 인정하거나 제한하는 법이 없다. 그 대신 ‘요정 로비’가 많고 정치자금을 빙자한 뇌물 공여가 많다. 현재 이같은 풍토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투명성’을 확보하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형편이다.

이권을 둘러싼 먹이사슬의 중앙에는 정치인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은 내각책임제여서 중앙 부처의 대신이나 장관들이 모두 현직 국회의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소속 당의 파벌 영수들이다. 따라서 재계의 이권 로비는 당에 집중되게 마련이고 관료들도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정 관 재계의 3자 관계를 ‘철(鐵)의 삼각 구도’라고 부른다.

파벌 영수 외에 로비의 표적이 되는 사람들은 국회 상임위원회의 터줏대감들이다. 한 상임위원회에 오래 있으면 업계 사정에 밝을 뿐만 아니라 관료들에 대한 영향력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이들 의원들을 ‘족(族)의원’이라고 부른다. ‘방위족’ ‘건설족’ ‘문교족’ 등으로 부르는 식이다.

이 때문에 불법 로비 사실이 종종 드러난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전총리는 총리 재직 시절인 1976년 미국 록히드사로부터 5억엔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83년 징역5년에 추징금 5억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88년에는 리쿠르트그룹이 주식을 공개하기 전에 정관재계 인사들에게 싼값으로 주식을 판 사건이 드러났다. 수뢰죄로 12명이 기소됐고 이 사건에 연루돼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총리는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에는 정계와 관계, 폭력단이 유착한 사가와 큐빈(佐川急便)사건이 터져 일본 전국이 시끄러웠고 이 사건 수사중에 당대 실력자 가네마루 신(金丸信) 자민당 부총재가 5억엔의 정치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기소됐다. 가네마루 사건을 파고들자 이번에는 대형 건설회사가 전건설상 국회의원 지사 시장 등 22명에게 거액의 뇌물을 준 사실이 확인됐다.

1998년에는 방위청 간부들이 부당하게 납품 금액을 올려 받은 업자들을 적발하고도 반납금액을 줄여준 사건이 드러났다. 엘리트 관료들이 업자와 유착되는 이유중에는 퇴직후 관련업계에 ‘낙하산 인사’로 가는 관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 정부는 업자와 공무원과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해 4월부터 ‘공무원윤리법’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접대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각자 부담으로 함께 여행을 하거나 골프를 치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다. 심지어 서서 하는 파티는 괜찮지만 앉아서는 밥도 함께 먹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낙하산 인사’의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퇴직후 2년 이내에는 퇴직 전 5년간 담당했던 업무와 관련이 있는 기업에는 재취업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또 중앙 부처 과장급 이상의 재취업 내용을 1년에 한 차례 일괄 공개키로 했다.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개인이 받는 창구는 없애고 지역구나 정당이 받아 이를 배분해 주는 방식으로 관련법을 고치고 있다. 그러나 몰래 만나 받는 것을 방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효과는 의문이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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