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종전25주년]치유되지 않은 상처

  • 입력 2000년 4월 30일 20시 35분


베트남이 하나가 된 지 30일로 25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사회 전반에 스며 있다.

동족상잔에 의한 무력 통일의 과정은 세월의 흐름만으로는 씻어낼 수 없는 아픈 기억들을 베트남 인민의 마음속에 남겨 놓았다.

통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트남의 진정한 통합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남북 문제’이다. 아직도 당서기장 총리 대통령 등 3역을 뽑을 때면 묵시적으로 지역 안배를 하고 있다.

경제특구를 만들 때도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남부상권과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상권을 똑같은 비율로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해야만 ‘국가 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정치 논리’는 그럴지라도 실제로는 전쟁에서 이긴 북부와 패배한 남부가 똑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당과 정부의 최고위직은 주로 북부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

호치민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한 남학생은 “남부 출신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승진에 한계가 있어 무역이나 자영업 쪽으로 진로를 돌린다”며 “남북은 아직도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랜 전쟁의 후유증인 피폐해진 경제와 빈곤의 심화도 베트남을 괴롭히고 있다.

도 무오이 전공산당 서기장에 의해 86년부터 ‘도이모이(쇄신)’정책을 도입해 절대 빈곤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선으로 줄었지만 베트남은 아직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00달러에 못 미치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로 남아 있다. 도이모이 이후 자본주의 바람이 불면서 계층과 지역간 빈부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도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대외관계, 특히 미국과의 관계도 여의치 않다.

95년 미국과 수교한 이후 급속히 진전돼온 양국 관계가 지난해부터 다시 소원해지면서 각종 경제 지원과 고엽제 피해보상 문제 등 현안들이 난관에 빠졌다. 지난해 체결 일보 직전까지 갔던 양국간 무역협정은 베트남 공산당측의 반발로 결렬돼 대규모 투자 유치를 바라던 경제계와 외국 투자자들을 실망시켰다.

이 때문에 전쟁이 남긴 고엽제 피해자 보상 문제도 덩달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이를 무역협정 체결 문제와 연계하려는 태도를 보이면서 구체적인 보상 협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미군은 62∼71년 무려 4200만ℓ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그 결과 베트남 국민 7600만명중 100여만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베트남이 당면한 가장 큰 고민은 ‘보수와 개방’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10여년간 추진해온 도이모이 정책으로 인해 사회주의 정체성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경제 개발을 위해 도이모이 정책의 계속 추진이 불가피하지만 이럴 경우 체제와 이념을 고수하기 어렵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하노이국립대의 한 교수는 “전쟁을 치르면서 각자의 지분을 확보한 당 지도층들이 물러나 세대 교체를 이룩해야만 국가지도 노선이 비로소 확립될 것”이라며 “베트남의 경제 성장과 사회 통합은 한 세대를 더 기다려야 한다”고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보수 성향의 레 카 피유 공산당 서기장과 개혁 성향의 판 반 카이 총리, 천 득 렁 대통령의 3인 합의제 지도체제가 계속되는 한 현재 베트남이 안고 있는 문제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출신 지역의 안배와 권력 기관의 나눠먹기식에 의한 현 합의 체제는 주요 정책의 결정을 늦추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경제 개방의 결과로 베트남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다당제 정치를 요구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경제계와 베트남 남부에서는 개혁 개방의 더욱 급속한 추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당과 국가의 장악력은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 지도부는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획기적 개방으로 나설 것인지 아니면 국가체제와 사회 기강을 새로 다지는 길을 걸을 것인지 이제 베트남은 양자 택일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하노이〓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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