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알바니아 작가 카다레 대담]

  • 입력 1999년 5월 13일 20시 12분


《파리에 사는 알바니아인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63). 지난 10여년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10월초면 어김없이 강력한 수상 후보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올해 그의 이름은 이른 봄부터 등장했다.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의 알바니아계 ‘인종청소’가 본격화된 이래 그는 ‘르몽드’ 등 파리의 주요 일간지와 아르테 등의 방송을 통해 세르비아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나토공습을 지지했다. 프랑스 외무부와 주한 프랑스 대사관 및 우리나라 대산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한 ‘한불작가교류프로그램’에 선정돼 프랑스를 방문 중인 작가 이청준이 11일 오후(현지시간) 한국작가로는 최초로 카다레를 만났다. 대담은 3시간동안 계속됐다.》

이청준〓내가 알바니아의 존재를 최초로 안 때는 초등학교 사회시간이었다. 세계지도에서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를 찾았는데 철로를 나타내는 기호가 없는 것을 보고 “참 이상한 나라다”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코소보 사태가 연일 언론에 보도될 때도 어린 시절에 느꼈던 이 생경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오기 직전 당신의 소설 ‘부서진 사월’과 ‘죽은 군대의 장군’을 읽으며 그 거리감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카다레〓내가 한국을 처음 만난 것은 6·25전쟁 때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라디오 뉴스시간마다 전황을 열심히 따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내가 다시 한국에 주목한 것은 김일성 때문이었다. 알바니아 공산당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와 김일성이 너무도 닮아 엔베르 호자가 다음에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알려면 김일성이 간 길을 보면 됐다.

▽이〓당신 작품을 읽으며 그토록 강하게 빨려들었던 이유는 알바니아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접한 국가이기 때문인 것같다. 당신의 작품 속에서 바다는 곧잘 ‘재난’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대륙과 섬을 잇는 반도국가라는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숱한 외침을 겪었던 나라의 작가로서 공감하는 바가 크다.

▽카〓바다는 알바니아가 미국 유럽 등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통로다. 바다는 번영의 가능성인 동시에 비극의 씨앗이다. 알바니아 주변을 내륙국들이 포위하듯 싸고 있다. 몬테네그로는 발칸반도의 국가들이 바다와 연결되는 유일한 지점이다. 오늘날 발칸반도에서 벌어지는 분쟁은 명분이야 어떻든 본질적으로는 바다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코소보사태와 당신 소설을 보면서 결국 ‘인간은 타인에 대한 살육을 멈출 수 없는 존재일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막막해졌다.

▽카〓물론 그 살육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는 출입구는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화해하는 것이다.

코소보에서 화해가 가능하려면 먼저 각자가 자신의 신화로부터 벗어나야한다. 6세기 전 오토만제국 시대에 알바니아계가 세르비아계를 지배했다는 구원(舊怨) 때문에 오늘날 세르비아계가 알바니아인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 말이나 되는가. 두 민족 다 자신의 과거를 영광으로 미화하거나, 과거때문에 타자를 미워할 권리가 있다거나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나는 광주나 분단같은 문제가 나오면 그걸 넘어서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면서 죄의식에 괴로워한다. 조국이 고통에 처하면 내 소설 속의 모국어들이 몹시 시달리는 것이다. 작가로서 비슷한 고통을 느끼지 않는가.

▽카〓작가가 역사적 사건에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몹시 중요한 문제다. 나는 정치참여가 싫다. 그러나 조국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한 지금은 내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다.하루에 20통 이상 알바니아 구명을 호소하는 전화를 받는다. 문학도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짐이고 알바니아문제 역시 내가 떠짊어지고 가야할 짐이다.

▽이〓정보화사회에서는 문학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지만 동시에 그런 여건이기 때문에 문학이 더욱 ‘희망의 언어’가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카〓민주화가 안된 한 분야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집단창작이나 대중에 복종하는 문학은 문학을 죽이는 길이며 민중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모택동은 문화혁명 당시 중국에 소설가 2백만명이 필요하다고 했다지만 나는 10명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가 1천명이라면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그냥 작가일 뿐이다.집단의 창조보다 개인의 창조가 훨씬 더 가치있다.

▽이〓당신과 같은 생각이지만 한국에서는 당신처럼 용기있게 말할 수 없다.(웃음)

▽카〓프랑스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다만 내가 공산독재에 저항하다 온 작가라는 점 때문에 무슨 말을 해도 다 용서해줄 뿐이다.(웃음)

▽이〓코소보문제 해결방식은 뭘까.

▽카〓코소보를 3,4년 동안 유럽 관리하에 두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쫓겨난 알바니아인들이 다시 코소보로 돌아가야 한다.

▽이〓당신 소설을 통해 알바니아를 50년만에 다시 발견했다. 당신의 목소리로 알바니아가 어떤 나라인가를 듣고 싶다.

▽카〓알바니아는 스위스와 그리스가 섞여있는 것같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다. 알바니아 민족은 모험가적이고 야심이 많다. 하지만 별 노력도 하지 않고 많은 것을 바라거나 잘난 척도 잘한다. 알바니아인들은 역사 속에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것일 뿐 결코 타자(타국)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알바니아인들은 코소보에서 정당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파리〓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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