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통화통일]중앙銀 독립성 상처…「유러貨」험로 예고

  • 입력 1998년 5월 3일 19시 32분


‘유럽 한지붕 시대의 개막에 웬 독불(獨佛)전쟁.’

유럽중앙은행(ECB)총재 지명을 둘러싸고 유럽연합(EU)회원국 정상들이 2일 오후1시부터 밤12까지 벌인 11시간 동안의 줄다리기와 진통을 한 관계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유럽통화통합이 당초부터 ‘동전의 양면’이라는 평가는 있었지만 총재인선을 둘러싼 갈등과 협상과정은 유러화체제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빔 뒤젠베르크 ECB총재 지명자가 8년의 임기중 적절한 시기에 물러나고 후임을 장 클로드 트리셰 프랑스중앙은행총재가 잇기로 한데 대해 EU의장국인 영국의 토니 블레어총리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사임하는 것은 마스트리히트조약 위반이 아니다”라고 군색하게 설명했다.

‘자퇴’라는 겉모양을 갖춘다 해도 ECB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총재임기를 임의로 분할하지 못하도록 한 마스트리히트조약 정신은 이미 크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유럽통화통합의 두 거인인 독일과 프랑스가 ECB총재자리를 놓고 끝까지 대립하다가 임기분할이라는 편법을 씀으로써 유러화는 ‘정치적 화폐’라는 인상을 주게 됐다. 이같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짐에 따라 유러화의 안정성에 대한 외환시장의 신뢰도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는 이번 회담에서 ECB부총재직을 확보하고 4년 뒤 총재직 승계까지 보장받아 최대의 승자가 됐다. 15개 회원국 중 14개국이 총재 임기분할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랑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출발을 위한 봉합’이긴 하지만 두고두고 앙금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다수 회원국이 ECB의 모델로 통화가치의 안정을 최우선시하는 독일 연방은행(분데스방크)을 꼽은데 비해 프랑스는 실업문제 해결과 공공복지 확대를 위한 탄력있는 통화정책 등 ‘정치적 운용’을 중시한다.

프랑스가 생각하는 유러화는 “유러화는 강해야 하지만 너무 강한 것은 원치 않는다”는 자크 시라크대통령의 말에 잘 함축돼 있다. 강한 통화는 화폐가치 안정에는 도움이 되지만 실업문제 해결의 전제조건인 경제성장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러나 독일 네덜란드 등이 안정을 우선시하는 통화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유러화체제는 기본적인 갈등요인을 안고 있다.각 회원국은 당장 내년 예산에 대한 협의와 금리차이를 줄이기 위한 협조를 해야 하지만 이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영국 더타임스지는 2일자 사설에서 “회원국간 입장차이의 조화가 과제”라며 “유러화체제는 거대한 정치적 도박”이라고 평가했다.

〈브뤼셀〓김상영특파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