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가 움직입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겸 CEO. 최근 오픈AI에 총 300억 달러(44조원)를 투자하겠다며, 엔비디아 주식(약 8.5조원어치)을 몽땅 팔아치웠죠. 어쩐지 일생을 건 베팅을 준비하는 도박사를 보는 듯한데요.
그게 바로 손정의 회장의 방식입니다. 모든 걸 다 걸어서 세상을 놀라게 할 성공을 거두거나, 반대로 거의 망하거나를 반복했죠. 그는 순진한 낙관론자일까요, 오만에 빠진 몽상가일까요. 기업가 손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책을 참고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 전 편집장 리오넬 바버가 쓴 ‘갬블링 맨(Gambling Man): 세계 최고의 파괴자 손 마사요시의 비밀 이야기’를 바탕으로 손정의 회장을 들여다봅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겸 CEO. 다시 그의 판이 시작됐다. 소프트뱅크그룹 제공
(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으로 귀화해 본명이 ‘손 마사요시’이지만, 여기선 한국에 익숙한 손정의라는 이전 이름을 씁니다.) *이 기사는 11월 14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
‘300년 제국’의 건설자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는 무엇을 하는 기업일까요. 처음엔 PC용 소프트웨어 유통업으로 출발해서 닷컴 스타트업을 대거 M&A를 하더니, 일본과 미국에서 통신 사업에 매진하는 듯하다가, 이젠 AI 기업에 주로 투자하는 펀드처럼 운영되죠. 1981년 창업 이래 정체성이 끊임없이 바뀌어왔는데요.
결국 소프트뱅크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기업입니다. 자동차나 가전 같은 제품을 제조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획기적인 기술을 발명하거나 소유하지도 않죠. 미국이나 중국의 기술업계 거물과 손정의 회장의 다른 점이라 하겠는데요.
기술자가 아니라는 건 그에겐 전혀 마이너스 요인이 아닙니다. 왜? 그는 자신만이 기술이 가지는 어머어마한 잠재력을 꿰뚫어 보는 비전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죠. 닷컴버블 정점이던 1999년 인수한 미국 온라인 증권사 ‘이트레이드’ 이사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죠. “내가 미래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1981년 24세 나이에 소프트뱅크를 창업한 손정의 회장. 소프트뱅크그룹 제공그래서 그는 M&A 딜을 할 때, 종종 시장이 놀랄 정도로 비싼 매수가를 제시하곤 합니다. 남들이 못 본 가치에 베팅하는 거죠. 투자금이 클수록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으니까요.
이런 남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이 2020년 1월 소프트뱅크에 자사주 매입을 압박할 때의 일입니다. 엘리엇 측이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를 지배구조 모범사례로 거론하자, 손 회장이 발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한 가지 사업에만 집중합니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을 창업했죠. 나는 수백 개 사업에 관여하고 있고, 전체 생태계를 통제합니다. 그들은 나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적합한 비교 대상은 나폴레옹, 칭기즈칸, 진시황이죠. 나는 CEO가 아닙니다. 난 제국을 건설하고 있다고요.”
그는 단기 성과 대신 장기 비전을 늘 말하는데요. 이때 장기란 30년이나 50년이 아니라 300년을 뜻합니다. 그는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더 멀리 바라봐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죠.
“명확하게 상상할 수 없는 건 시야를 30년으로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대담하게 시작해서 300년 앞을 생각하세요. 그러면 30년 후의 상황을 거꾸로 생각해 볼 수 있죠.”
과도한 낙관주의의 매력
비전을 크게 가지는 거야 좋지만, 너무 허황된 건 아닐까요. 손정의 회장 이야기에서 신기한 점은 그의 이런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많은 이들을 매혹시켰단 점입니다. 순진함과 허세가 결합한 모습이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하곤 하는데요.
‘일본 전자산업의 전설’ 사사키 타다시 샤프 전 부사장(1915~2018년)은 20대 손정의가 사업가로 설 수 있도록 끌어준 인물이죠. 청년의 눈빛에 매료된 그는 자기 집까지 담보로 잡아 소프트뱅크 사업자금을 대줬습니다.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1955~2011년)와의 스토리도 인상적인데요. 닷컴 버블 붕괴로 쫄딱 망했다가, 초고속 인터넷 통신 사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손정의 회장. 2005년 여름 잡스를 만나 자신이 한 아이팟 신제품 스케치를 보여줍니다. 단순히 MP3 플레이어가 아니라 데이터와 이미지까지 처리하는 모바일 기기, 즉 스마트폰 스케치였죠.
이를 본 잡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형편없는 그림은 주지 마. 내 그림이 있으니까.” 극비리에 개발 중이던 아이폰에 대한 힌트를 잡스가 슬쩍 던진 건데요. 손 회장은 이를 놓치지 않고 “그 제품이 나오면 일본 내 독점 유통권을 달라”고 매달렸고요. 구두로 잡스의 오케이를 받아냅니다.
올해 7월 인공지능을 주제로 프리젠테이션에 나선 손정의 회장. 그는 청중을 사로잡는 프리젠테이션 실력으로도 유명하다. 소프트뱅크그룹 제공몇 달 뒤 손정의 회장은 이동통신업체 보다폰 재팬 인수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잡스에게 “당신 약속을 믿고 170억 달러짜리 베팅을 했으니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했죠. 잡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합니다. “넌 미친놈이야. 얘기했던 대로 할게.” 2008년 아이폰 3G 모델이 일본에 출시됐을 때, 이를 3년 동안 독점 판매한 건 소프트뱅크였습니다.
2016년 손정의 회장이 1000억 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큰 규모로 비전펀드 조성에 나섰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측이 처음부터 호의적인 건 아니었죠. 사우디 상무부 장관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따지듯 묻습니다. “당신은 ‘원맨쇼’입니다. 영웅에서 제로(zero)가 됐고, 다시 영웅이 됐죠. 당신이 다시 제로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죠?”
손 회장은 이렇게 받아칩니다. “재산의 98%를 잃고도 살아 돌아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분위기는 누그러졌고, 75분 뒤 두 사람은 끌어안고 기념 촬영을 했죠.
물론 손정의 회장의 마법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닙니다. 2017년 손 회장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을 만나기 위해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를 찾아갑니다. 비전펀드 투자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죠. 당시 87세였던 버핏은 소박한 사무실에서 일행과 마주 앉습니다. 손 회장은 아이패드 속 투자 자료를 보여주며 자신의 눈부신 과거 투자 실적을 자랑했는데요. 버핏은 자신은 부채에 관심 없는 구식 투자자라며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현금 흐름 전문가예요.” 당연히 버핏은 비전펀드에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알리바바를 발굴한 직감
손 회장은 자신과 닮은 창업가에 끌리곤 합니다. 그게 바로 그의 인생 최고의 성공, 알리바바 투자의 비결이었죠. 1999년 알리바바가 아직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그는 단 6분간 마윈을 만난 뒤 투자를 결정합니다. 마윈의 눈빛에 담긴 굶주림과 열망에 끌린 거죠.
당시 소프트뱅크 이사회는 알리바바 투자에 반대했습니다. 마윈은 엔지니어도 아니고, 제품 전문가도 아니고, 단지 비전을 가진 젊은이일 뿐이라는 게 반대 이유였는데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손 회장은 마윈에게서 젊은 시절 자신을 봤습니다.
이후 알리바바는 소프트뱅크의 투자를 기반으로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으로 급성장했고요. 2014년 알리바바의 뉴욕증시 상장으로 초대박이 난 건 지분 34%를 보유한 소프트뱅크였죠. 2000만 달러 투자금이 15년 만에 578억 달러로, 3000배가 됐으니까요.
손정의 회장 인생의 최고의 투자는 중국 알리바바였다. 소프트뱅크그룹 제공그리고 이 강렬한 성공의 기억은 그를 사로잡아, 독이 되고 말았는데요. 2016년 손 회장이 “오늘날 알리바바처럼 보이는 것 그 사람뿐”이라고 찜한 창업가가 있었으니. 바로 공유오피스 위워크의 아담 노이만이었죠. ‘세계의식 고양’이란 허무맹랑한 구호를 외치는 야심가에게 홀딱 반해서 44억 달러를 덜컥 투자했고요. 결국 최악의 투자 실패로 남았습니다.
그럼, 이번 소프트뱅크의 오픈AI에 대한 투자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다음 달 225억 달러(약 33조원)를 추가 투자하면 소프트뱅크는 오픈AI 지분의 11%를 확보하게 된다는데요. 오픈AI가 진짜 돈을 벌 수 있느냐에 대한 회의론이 현재로선 큰 상황이죠. 돈 잘 벌고 있는 엔비디아 지분을 전부 팔아서, 적자투성이 오픈AI에 올인하는 게 맞는 결정일까요.
물론 결과를 예측할 순 없지만, 이게 바로 손정의 회장의 투자 방식입니다. 그는 디지털 경제에선 고객 수와 시장 점유율이 현금흐름이나 수익성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믿죠. 손실을 감수하고 빚을 늘려서라도 일단 점유율을 키워놓으면, 결국 돈은 따라오기 마련이란 겁니다. (버핏과는 정말 맞지 않습니다)
2001년, 빚더미였던 소프트뱅크가 막대한 투자비가 드는 초고속 인터넷 시장에 진출했을 때, 언론은 이를 “(겨울을 앞둔) 9월 중순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나폴레옹 같은 미친 짓”이라 꼬집었습니다. 하지만 손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죠. “이 업계는 선발주자, 개척자가 큰 성공을 거두곤 합니다. 성공한 기업은 처음부터 큰 자본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비전과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합니다. “사람들은 소프트뱅크의 현금 흐름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죠. 하지만 나는 제품 판매만 현금 흐름을 창출한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해요. 제품 판매와 기업 상장, 모두 현금 흐름을 창출합니다. 우린 훌륭한 현금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장으로 잭팟을 터뜨리면 한번에 만회할 수 있다는 마인드가 도박사와 비슷하죠. 어쩐지 지금의 상황과도 오버랩됩니다.
모든 걸 잃고 다시 일어서는 자
손정의 회장은 여러 번 거의 망했습니다. 2000년 닷컴버블 붕괴 땐 재산의 98%를 잃고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잃은 사람’이 됐고요. 2008년 금융위기 땐 소프트뱅크 주가 급락으로 순자산이 마이너스(개인 부채>보유 지분)로 떨어지며 사실상 개인 파산 상태가 됐었죠. 특히 위워크를 포함한 비전펀드 투자의 참담한 실패로 2022년 소프트뱅크는 역대 최대 적자를 기록했고요. 한동안 ‘손정의도 끝났다’는 평가가 이어졌는데요.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고, 다시 엄청난 집중력과 열정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그를 두고 영원히 바위를 산 위로 굴리라는 저주를 받은 고대 그리스 왕 시시포스에 비유하죠.
그는 어떻게 그렇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갬블링 맨’의 저자 리오넬 바버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는 세상을 다르게 봅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민가에서 태어난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건 상대적인 겁니다. 그저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다음 고향 도스시 빈민촌의 한국인처럼 다시 일어서는 겁니다.”
올해 2월 도쿄에서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만난 손정의 회장. AP 뉴시스어떻게 보면 그는 사실 큰 방향에선 옳았습니다. 특히 AI에서 그렇죠. 그는 2016년 비전펀드를 조성할 때부터 ‘AI 혁명’을 외쳤고요. 2019년 방한 당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만나서도 “한국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AI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죠. 비전펀드 1호와 2호가 엉뚱한 기업에 투자금을 한참 낭비해버린 뒤에야, 챗GPT가 등장했으니까요. 손 회장도 이제 와선 “타이밍 면에서 우리가 너무 일찍 행동했던 것 같다”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공격 앞으로를 외칩니다. 2025년 1월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무려 5000억 달러 규모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발표했고요. 오픈AI뿐 아니라 바이트댄스, 퍼플릭시티AI 등 세계 최고 AI 기업을 포트폴리오로 보유 중입니다. 최근엔 미국 칩 설계사 암페어 컴퓨팅 인수(65억 달러), 스위스 ABB의 로봇팔 제조업 인수(54억 달러)에 합의했죠.
올해 소프트뱅크 주가 상승률은 129%. 손 회장은 10월 말 잠시 유니클로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를 제치고 일본 최고 부자로 다시 등극했습니다(이후 재역전).
이거 또 판이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는데요. 책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손정의 회장은 아마도 에이스 카드를 쥐고 있진 않지만, 여전히 최고의 테이블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전부를 걸 기세로군요. By.딥다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