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윤여정의 수상에 박수칠 자격이 없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05-23 15:22수정 2021-05-2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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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뷰파인더㉜] 인습적 여성혐오의 ‘생존자’
● 오스카 거머쥔 완벽한 연기자
● 가시밭길의 이름, 가부장제
● ‘악녀 장희빈’, 광고에서 잘리다
● ‘길티 플레져’와 국뽕 스민 호들갑
● 수많은 ‘윤여정들’에게 보내는 박수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배우 윤여정이 4월 2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레드카펫에 올라 웃음 짓고 있다. [AP 뉴시스]

온 나라가 윤여정 열풍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오스카상 수상이라는 경사가 벌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지인처럼 매끄러운 발음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또박또박 전달하는 ‘윤여정식 영어’도 화제다. 덕분에 적잖은 사람이 ‘영어 울렁증’에서 벗어나 힐링을 맛보고 있다. 글렌 클로즈 같은 대배우와 맞붙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한국의 ‘할머니’ 역할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았으니 이런 쾌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반응들은 어딘가 불편하다. 배우 윤여정의 수상을 축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지금 쏟아지는 요란한 찬사가 애써 가리고 덮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배우로서 오래도록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그가 ‘꽃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그는 한 사람의 배우이자 여성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통과했다. 가시밭길의 이름은 대한민국 가부장제와 보수적 성역할, 그리고 여성혐오였다. 윤여정은 설령 오스카를 받지 못했더라도, ‘유별난 여자’를 향한 우리 사회의 공격성을 온전히 받아내고 극복했다는 것만으로 박수 받아 마땅한 승리자다.

주요기사
‘악녀 장희빈’과 이유 없는 적개심
윤여정은 대학교 1학년이던 1966년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해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김기영 감독의 1971년 작 ‘화녀’의 주연을 맡아 농염하면서도 강렬한 연기를 펼치며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46년생 윤여정은 고작 스물다섯 나이에 한국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윤여정은 배역에 대한 이해, 표현력, 순발력 등 모든 분야에서 빠질 데 없는 완벽한 연기자이지만, 그간 맡아온 주요 역할은 무난한 ‘호감형’이 아니었다. 대체로 ‘연기파’에게 어울리는 무언가로 간주되는 역할, 많은 경우 악역이었다.

‘화녀’에서 윤여정은 작곡가 동식의 집에 하녀, 즉 식모로 들어가 겁탈을 당하고 동식의 아내에 의해 강제로 유산을 당한 후 복수극을 펼친다. TV에서의 히트작 ‘장희빈’ 또한 마찬가지다. 장희빈이 어떤 캐릭터인지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악녀 장희빈’의 전범을 만든 사람이 바로 윤여정이다.

청춘스타로 잘 나가던 윤여정은 갑자기 미움의 대상이 됐다. 당시 윤여정은 청량음료 오란씨의 광고 모델이었다. 그의 얼굴이 새겨진 포스터가 있었는데, 눈에 구멍이 뚫리는 식의 ‘테러’가 자행됐다. 급기야 윤여정은 광고 모델에서 잘렸다. 본인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사람들이 방송국으로 쳐들어왔고 문방구 주인은 물건 같은 것을 던지기도 했단다.

이 이야기를 과연 ‘뭘 몰랐던, 순박했던 시절’의 추억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물론 윤여정은 그런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 것과, 우리가 ‘정말 괜찮은 일이었구나, 아무 것도 아니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 후로도 윤여정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그를 향해 이유 없는 적개심을 표출하는 대중 역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음악다방 ‘쎄씨봉’의 멤버들과 어울려 멋진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 중 한 사람인 가수 조영남과 연애를 거쳐 결혼까지 했다. 조영남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윤여정도 그 길에 함께 했다.

13년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끝났다. 귀국한 그는 두 아들을 양육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은 반발했다. ‘어떻게 이혼한 여자가 TV에 출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여정은 그 반발을 온전히 실력으로 돌파했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윤여정의 귀국 후 첫 출연작은 박철수 감독의 ‘어미’(1985)였다. ‘어미’는 김수현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 때문에 더욱 유명한 작품이다. 시놉시스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비극으로 끝나는 한국판 테이큰’이다. 라디오 진행자이며 저명한 작가인 홍 여사(윤여정 분)는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싱글맘이다. 고등학생인 딸은 엄마가 홀아비인 최 교수(신성일 분)를 만나 밀회를 즐기는 동안 인신매매 조직에 납치당한다. 딸은 강간당한 후 성매매 업소로 팔려가고, 그런 딸을 찾기 위해 어머니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하지만 딸은 충격을 극복하지 못해 자살하고, 어머니는 세상을 향한 복수극을 벌인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어미’는 그리 좋은 작품이 아니다. 설정과 각본, 연기 모두 훌륭하지만 지나치게 선정적인 연출이 몰입을 깨뜨린다. 김수현 본인부터가 이 작품을 극장에서 본 후 매우 격분했다. 이후 김수현은 박철수와 절대 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말을 지켰다.

김수현이 택한 최적의 배우
1995년 11월 18일 첫 방영된 KBS2 ‘목욕탕집 남자들’은 김수현 작가가 대본을 썼다. 극중에서 윤여정(왼쪽)과 고두심이 대화하고 있다. [KBS 제공]

대신 김수현의 파트너로 등극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윤여정이었다. 연기 잘 하고 탁월한 대사 전달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좋건 나쁘건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얻고 있는 스타. 하지만 그에게 끼얹어진 오명 아닌 오명 때문에 다른 작가나 연출자들이 선뜻 데려가지 못하는 문제적 인물. 하지만 김수현은 KBS2 ‘목욕탕집 남자들’, MBC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등 주요 히트작에서 윤여정에게 좋은 배역을 연이어 맡겼다.

중요한 건 각각의 작품에서 윤여정이 수행한 역할이다.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철모르는 로맨티스트 둘째 며느리(목욕탕집 남자들), 여주인공을 발탁해 배우로 발돋움하게 해주는 당찬 여성 디자이너(사랑과 야망),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가부장적인 집에 시집가는 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친정엄마(사랑이 뭐길래).

여기에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다. 한국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좋아하는,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여성의 역할’로부터 어딘가 벗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여성에 대한 입체적 시각을 드러내기 위한 최적의 배우가 바로 윤여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수현은 대중이 보는 드라마를 쓴다는 자의식을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 결론에 다다르면 사회 통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신 화해와 통합, 혹은 봉합을 선택했다. 특히 큰 성공을 거둔 홈드라마에서 그런 경향이 도드라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당시 한국 사회의 평균보다는 한 발자국, 최소한 반 발자국 정도는 앞서 나가는 인식을 보여줬다. 그런 까다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게 윤여정의 주요 임무였다.

2007년 SBS에서 방영된 ‘내 남자의 여자’에 대해 당시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와 유지나 동국대 영상영화학과 교수가 나눈 대담을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김수현은 과거에 보여줬던 도발성에서 나아가, 이번 드라마에서는 결혼제도, 즉 가부장적 일부일처제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친구의 남편과 바람이 난) 김희애가 ‘셋이 같이 살자’고 말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거죠.”

“영화로 비교하면 김수현 정도의 여성의식이면 상당한 것입니다. 박철수 감독이 영화화한 ‘어미’만 봐도 그렇죠. 페미니즘 텍스트 같아요. TV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페미니즘 의식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은근슬쩍 봉합하는 마무리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어미’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어미’는 김수현의 스크린 복귀작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렇듯 윤여정은 김수현과 짝을 이뤄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평면적인 역할을 극복해나갔다.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로도 그랬고, 현실 속의 한 인간으로도 그랬다.
물론 그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장희빈’ 시절처럼 여기저기서 봉변당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윤여정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너무도 재미있는 김수현 드라마에서, 주어진 역할을 너무 잘 해내기에, 안 볼 수가 없었을 뿐이다. 이렇게 윤여정은 왕년의 청춘스타에서 벗어나 중견 배우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한 번 확보해갔다.

사회가 즐겨오던 ‘길티 플레저’
4월 29일 서울 노원구의 한 영화관 전광판에 영화 미나리 포스터가 나오고 있다. 배우 윤여정이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도 다시 높아지는 분위기다. [뉴스1]

2021년 4월, 윤여정은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자 한 언론에서 그의 전 남편인 조영남을 인터뷰했다. 조영남은 ‘대단한 일이다, 바람 피워서 이혼당한 남편에 대한 최고의 복수’라는 식의 코멘트를 했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다시 한 번 여론의 된서리를 맞고 있다.

물론 조영남의 저 발언은 주책없는 소리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전후 맥락 자체가 너무도 이상하다. 윤여정을 ‘조영남의 전 부인’으로 바라보고, 이혼했다는 사실을 죄악시하고, 심지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이야깃거리로 삼던 것은 조영남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식이었다. ‘쎄씨봉’ 회원들의 음악이 다시 유행하고, 급기야 2018년 영화 ‘쎄씨봉’이 개봉할 당시를 떠올려보자. 그 시절의 추억담이 입에 오르며 윤여정은 계속 원치 않는 맥락으로 소환됐다. 대중 역시 그런 ‘추억 팔이’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윤여정을 두고 한 배우와 연기를 이야기하는 대신 그의 실패한 결혼을 논하며 시시덕거리던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즐겨오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어떤 행동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결국 즐기게 되는 심리) 아니었던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스카상 수상에 대한 조영남의 발언이 마뜩찮은 것과는 별개다. 조영남 한 사람만을 극렬히 비난하면서 마치 자신은 결백한 양 서둘러 알리바이를 만드는 듯한 모습에 외려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은 나뿐인가.

지금 나는 윤여정이라는 훌륭한 배우를 두고 여성혐오의 ‘희생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본인도 그렇게 인식되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성혐오의 ‘생존자’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콧대 높은 여자, 똑똑한 여자, 한 마디도지지 않는 여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따지고 드는 여자. 그런 여자가 인생 안 풀리고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혈안이 된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잊어서는 안 된다.

윤여정은 늘 그랬다.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고답적이고 인습적인 여성상을 잘 알았다. 그러면서도 반대 되는 길을 택해왔다. 그의 인생은 그로 인해 순탄하게 흘러오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71년 3월 11일,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 그대로 한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순종에서 벗어난
“저는 결코 미인이 아니죠, 김기영 선생님도 저를 퍼니페이스(funnyface)라고 하셨는데 저 역시 동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역은 근본적인 여성의 매력, 순종이나 미적인 감각을 벗어난, 웬만해선 타협이 잘 안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역할입니다.”

윤여정에게 진정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면, ‘국뽕’ 중심의 과도한 호들갑을 멈추는 게 어떨까. 대신 대중의 편견과 증오를 딛고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여성 예술가들을 좀 더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포용할 수 있어야겠다. ‘47년생 윤여정’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윤여정들’을 향해 힘찬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이 기사는 신동아 6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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