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의 양지’ 신수원 감독 “기저귀차는 콜센터 직원,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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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년 11월 11일 18시 07분


‘젊은이의 양지’ 포스터 © 뉴스1
‘젊은이의 양지’ 포스터 © 뉴스1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달 말 개봉한 영화 ‘젊은이의 양지’(감독 신수원)에는 양지가 없다. 음지에서 고통받는 젊은이들의 슬픈 얼굴을 그려낼 뿐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에 마음껏 도전해보지도 못한 채 짓눌려 있는 이 청춘들의 옆에는 이를 묵인한 채 인생실습이라는 허울 좋은 경험치를 들이미는 어른들이 있다. 이런 어른들의 삶도 팍팍하기는 매한가지지만.

연출자 신수원 감독은 ‘젊은이의 양지’라는 제목이 갖고 있는 역설에 대해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로 결정했던 제목은 ‘젊은이의 양지’였지만, 중간에 ‘인생실습’이라는 제목으로의 변경을 고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이 제목을 택한 이유는 ‘젊은이의 양지’라는, 영화의 무거운 느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면서도 역설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감독이 직접 사비까지 들여가며 연출한 ‘젊은이의 양지’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후 약 1년이라는 긴 시간 후에 개봉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대형 영화들의 등쌀 속에서 개봉 시기를 고려하고 또 고려해야하는 저예산 예술 영화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때문에 더욱 관객들과의 만남에 늦어지게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가 됐어도 심리적으로 관객들이 극장과 마음이 멀어요. 그래서 코로나 이후에 개봉이 어떤 건지를 여러가지로 실감하고 있어요. 상업 영화도 그렇고 걱정이에요. 하나씩 마음을 비우고 있어요, 개봉하는 것에 감사하죠.”

‘젊은이의 양지’는 카드 연체금을 받으러 갔다가 사라진 후 변사체로 발견된 실습생으로부터 매일 의문의 단서를 받게 되는 채권추심 콜센터 계약직 센터장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김호정이 휴먼네트워크 콜센터의 계약직 센터장 이세연 역할을, 윤찬영이 휴먼네트워크 콜센터 현장실습생 이준 역할을 맡았다. 또 정하담이 이세연의 중소기업의 인턴으로 있는 이세연의 외동딸 김미래를, 최준영이 준과 연체금 독촉 전화로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는 한명호 역할을 맡았다.

영화는 콜센터를 배경으로 한다. 실습생으로 콜센터에서 취직한 19세 실습생들은 빡빡한 일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딘다. 특히 주인공 이준은 극중 방광염으로 인해 기저귀를 차고 근무를 하는 것처럼 묘사돼 초반 충격을 안긴다. 관객의 입장에서 실제로 그런 일들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저도 충격이었어요. 자료 조사 하던 중에 알았죠. 콜센터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방광염에 자주 걸린다고 해요. 콜센터에서 근무한 분 중에 기저귀를 차고 근무한 적이 있다는 걸 취재하던 도중에 어떤 글에서 봤어요. 자주 방광염에 걸린대요. 진짜 콜센터 직원을 취재했을 때 그 분은 기저귀 찰 정도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고 했어요. 화장실 가는 것도 자리를 비우는 거라서 보고를 해야한대요. 모멸감을 느낀다고 하셨어요.”

가장 처음 영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구의역 김군 사고’라고 불리는 사고였다.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19세 실습생이 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된 사건이다. 당시 외주업체에서 근무하던 실습생이 처했던 열악한 환경이 고스란히 알려지며 많은 안타까움을 준 바 있다.

“온몸이 찢겨 죽는 건데 그 고통이 어땠을까 생각이 났어요. 세월호 참사도 있고 집단적인 죽음에 대한 잊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사태였죠. 그리고 나서 19세 콜 센터 직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있었고, 여학생이었어요. 그 사건도 같이 들여다 보게 됐어요. 어린 나이에 강제로, 자기의 선택에 의해서 간 일터도 아닌 곳에, 내던져진 거죠. 선생님들 얘기를 들어도 돌아오는 학생들이 많대요. 콜센터 실습생 같은 경우는 감정 노동에 힘들지 않았을까, 또 제 지인 중에 콜 센터에 오래 근무한 친구도 있어 콜 센터를 배경으로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실습생이 아닌 센터장이라고 해서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에서는 본사에서 들어오는 여러 가지 요청들과 성과에 대한 압박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센터장 이세연(김호정 분)의 모습이 고통스럽게 그려진다. 이세연은 어린 직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돼주고 싶지만, 결국 자신의 앞에 있는 어려움 때문에 이를 포기한 인물이다. 이세연은 50대인 신수원 감독과 같은 세대다. 혹 감독 자신의 모습이 들어간 인물은 아닐까.

“세 인물에 저의 모습이 다 반영돼 있어요.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인물에 자기 모습을 투영하게 되죠. 준이 같은 경우는 제가 스무살이었을 때 어떤 모습이 담겨있어요. 스무살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정신 없이 공부를 했다가 딱 스무살이 되는 순간, 뭔가 기대가 되면서 겁이 나는, 무서웠던 기억이 있어요. 새로운 나이가 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자체가 겁이 나던 기억이에요, 그걸 끄집어 내려고 노력했죠. 세연은 제 나이에 가까워요. 오픈 마인드로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약해져 있는 존재죠. 나이가 들면 나약해져요. 점점 더 약해지고 우유부단해지고, 진실을 알면서도 눈을 감아버리고 귀를 닫아버리려고 하죠, 현재 기성 세대의 모습이 아닌가 해요.”

다른 캐릭터들도 그랬지만 취준생 미래의 캐릭터를 위해서도 신수원 감독은 노량진에 가서 열심히 취재를 했다. 영화에는 함께 자신의 책상 위를 공유하는 스터디 그룹이 등장하는데, 이것 역시 감독의 공시생들이 많이 가는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엿듣는 등 감독의 열혈 취재를 통해 탄생한 장면이다.

“저도 놀랐어요, 이렇게도 공부를 하는구나. 자기 방에서 공부하는 게 심심하니까 서로를 격려하기도 하고 하는 거죠. 실제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데, 영화에서도 그 프로그램 소스를 CG팀에서 심어 재현했어요.”

‘젊은이의 양지’는 이탈리아 피렌체 한국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고 일본 아이치 국제여성영화제 오피셜 셀렉션, 체코 프라하 국제영화제 페스티발 포커스 부분에 초청에 이어 홍콩 국제영화제 글로벌 비전 부문에 초청돼 상영되는 등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또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등 각종 영화제에 초청됐다. 신수원 감독 특유의 미스테리한 느낌을 주는 연출과 현실에 맞닿아 있는 내용이 좋은 평을 받았다.

‘젊은이의 양지’의 개봉을 기다리는 동안 신수원 감독은 차기작 ‘오마주’를 완성했다. 이정은과 김호정이 출연하는 이 영화는 ‘젊은이의 양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 될 전망이다. 60년대 활동한 여성 영화 감독 홍은원의 잃어버린 필름을 찾아나서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판타지 같은 작품이다.

‘명왕성’(2012)부터 ‘마돈나’(2014) ‘유리정원’(2017) ‘젊은이의 양지’까지. 신 감독의 세계는 조금씩 더 확장되고 있다. 앞서 신 감독은 ‘젊은이의 양지’의 시사회에서 “좋은 어른이란 생각하는 어른”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그가 계속해 보여주고 있는 영화에는 ‘좋은 어른의 생각’이 담긴 듯 하다.

“살면서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걸 조금만 생각해도 세상은 좋아지지 않을까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게 없어서 한국의 어떤 기성 세대들이 욕을 먹어요. 고생을 많이 한 세대기도 하지만, 욕도 많이 먹죠. 자기가 생각하는 신념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기성세대가 많죠. 내가 믿는 것이 틀릴 수 있는데 그 생각을 안 해요, 나이가 들면 안 하죠. 나이가 들면 세상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기 방어에 능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안 해요. 약해진다고 해야할까요? ‘꼰대’가 달리 ‘꼰대’가 아니라 나약해서 ‘꼰대’가 된다고 생각해요. 우유부단해지고, 자신을 어떻게 보호할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이런 것 때문에 자기 주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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