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이 옥주현에게 입맞춤을 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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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8일 13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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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경험이다. 음악을 들을 때 특정한 풍경이 떠오르는 일은 종종 겪어 보았지만, 수많은 얼굴이 차례차례 교차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대부분은 모르는 얼굴이다. 얼굴의 피부색도, 표정도 제각각인 수 백 명의 얼굴이 그의 지휘봉이 흔들릴 때마다 나타나고, 지워지고, 또 다시 거품처럼 솟아올랐다.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서울 내한공연이 열린 17일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우리 나이로 여든넷의 노장인 엔니오 모리코네는 올해 자신의 작품으로만 프로그램을 짠 ‘시네마오케스트라’라는 공연으로 세계 투어에 나선다. 서울공연은 그 출발지가 된다.

몇몇의 연주자, 소프라노 가수만을 대동하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공연에 동원된 물량은 상당한 것이었다. 한국의 민간오케스트라인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서울모테트합창단이 그를 위해 무대에 올랐다.
당장이라도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울려 퍼질 듯한 분위기였다.

이들은 이날 공연된 작품 중 가장 큰 박수를 받은(앙코르곡으로 재연주 되었다) 영화 ‘미션’의, 저 유명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에서 폭발적인 음량과 박력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울려댔다.

대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피아니스트의 전설’, ‘말레나의 테마’에 눈을 지그시 감았고, ‘석양의 무법자’, ‘열대의 변주곡’에 마음껏 흥분했다.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한 ‘미션’의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이르러 아껴두었던 한 줌의 감성을 남김없이 소모시켰다.

두 명의 보컬리스트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대동하고 온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수잔나 리가치는 몇 몇의 작품에서 매우 아름답고 맑은 음성을 들려주었다. 노래를 부르는 모습 자체는 썩 아름다웠다고 하기 어려웠지만(움직임이 기묘했다) 그녀의 노래(우리 식으로 치면 구음에 가까웠다)만큼은 너무도 투명해 손을 대면 비칠 것만 같았다.

2막 초반에는 뮤지컬배우 겸 가수인 옥주현이 게스트로 등장했다.
1막이 끝난 뒤 휴식시간에 대기실에서 만난 옥주현은 “원래 2막 후반부에 노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변경돼 초반에 무대에 선다. 지금 너무 너무 떨린다”라면서도 거장과의 협연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2막이 시작되자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등장한 옥주현은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가사를 붙인 ‘가시 속의 장미(A Rose Among Thorns)’를 불렀다. 같은 원곡의 노래로는 ‘넬라판타지아’가 있지만, ‘가시 속의 장미’는 좀 더 풍성한 사운드와 깊이 있는 편곡, 무엇보다 가수의 기량을 요구하는 고난이도의 곡이었다.

연습기간이 짧았음에도 옥주현은 결코 쉽지 않은 이 곡을 특유의 파워풀한 성량과 기교로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늘씬한 몸매를 드러낸 검정색 드레스와 보석 목걸이로 장식한 무대의상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냈다.

옥주현이 노래를 마치자 흡족한 얼굴로 엔니오 모리코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관객의 박수가 쏟아졌다.

지휘봉을 내려놓은 거장이 뚜벅뚜벅 걸어 나가 버린 뒤에 남은 것은 텅 비어버린 충만함.
관객의 기립박수가 이어졌고, 노장은 열 차례 가까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그가 큼직한 악보집을 들고 퇴장할 때까지, 관객은 다섯 곡의 앙코르곡 선물 꾸러미에 행복해 했다.

스무 편쯤의 영화를 한꺼번에 다 보고 난 듯한 멋진 콘서트였다.
다시 한 번 그의 모습을 한국무대에서 보고 싶다. 세월을 잊은 거장의 힘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
다시 한 번, 그의 무대에서 기립하고 싶다.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트위터 @ranbi361) ranbi@donga.com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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