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가지의 무비홀릭]‘이끼’로 돌아온 강우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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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20일 03시 00분


관객에 대한 두려움에 절치부심
군더더기 버리고 간결함 되찾다

박해일이 주연을 맡은 강우석 감독의 신작 ‘이끼’. 이 영화 속 대사처럼 관객에 대한 두려움이 강 감독을 구했다. 사진 제공 이노기획
박해일이 주연을 맡은 강우석 감독의 신작 ‘이끼’. 이 영화 속 대사처럼 관객에 대한 두려움이 강 감독을 구했다. 사진 제공 이노기획
‘실미도’(2003년)가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넘어서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룩한 뒤 강우석 감독은 성공의 덫(success trap)에 걸려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강 감독은 실미도 성공의 핵심적인 이유가 ‘관객의 분노를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이후 그는 관객의 공분(公憤)을 일으킨 뒤 영화 막판에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적’을 응징함으로써 관객의 마음을 후련하게 풀어주는 것을 흥행의 핵심 유전자로 확신한 듯했다. 이 같은 추정은 실미도 이후 그가 내놓은 ‘공공의 적 2’(2005년), ‘한반도’(2006년), ‘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2008년) 같은 작품들에서 뚜렷이 입증되는데 실미도 이후 강 감독의 영화들은 한마디로 잔소리가 많아지면서 설교조로 흐르는 것이다.

물론 평소 사는 게 힘들고 상대적 박탈감도 심한 한국 관객들로선 “비겁한 변명입니다!” 같은 실미도 속의 대사들에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법하다. 문제는 실미도의 성공이 되레 강 감독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강 감독은 ‘한국 관객은 바로 이런 걸 좋아해’라는 자기 확신이 극도로 강화되었고 이후 그의 영화는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와 촘촘한 이야기가 사그라지면서 등장인물들이 앞다퉈 내뱉는 단순직설적인 대사로 차고 넘친다. 한국인의 민족감정과 반일감정에 기대는 영화 한반도에서 이런 현상은 극에 달한다. ‘회장’으로 불리는 국가 원로는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혹여 국민들이 잘못된 생각에 빠진다면 두드려 패서라도 정신을 차리도록 해주는 게 지도자의 일이지”라며 관객들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가 하면 일본 외상의 면전에다 “외상이 좀도둑처럼 아무도 몰래 찾아들어와 협박을 하는 건 어느 나라 외교법입니까” 하고 따져 묻는 대통령(안성기)의 모습은 속이 후련하기보다는 유치하고 비현실적이다. 실미도 이후 강 감독의 영화는 메시지로 가득한 선동 영화로 전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4일 개봉된 강 감독의 신작 ‘이끼’는 나에게 굉장히 놀랍고 대단하게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 그는 극도의 긴장 순간에 능청스럽고 느닷없이 유머를 구사하는 기존 스타일을 잃지 않고 있지만 기본적으론 실미도 이후 그가 내놓은 이른바 ‘공분자극형’ 영화와는 완전히 반대 지점에 선 영화였던 것이다.

이끼에서 강 감독은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화적 템포와 긴장과 재미에 탐닉한다. 이야기의 밀도는 높아지고 속도는 빨라졌다. 캐릭터는 스스로 숨쉰다. 인물들은 자신이 해야 할 만큼의 대사만을 던진다. 잔소리가 없고, 임팩트는 더 크다. 선악이 있되 구분되지 않는다. 영화는 간결한 동시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번 신작이 강 감독이 2000년대 들어 연출한 영화 중 유일하게 ‘원작’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 원작이 누리꾼의 지배적 관심을 받은 동명의 인터넷 만화였다는 점에 더욱 주목한다.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했으니 관객들은 완성도 높은 이 만화와 강 감독의 영화를 비교해볼 것이 뻔할 터. 다시 말해 강 감독은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삼아 맘대로 말하고 싶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옭아매어버리는 것이다. 바다요정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돛대에 매단 오디세우스처럼 말이다.

나는 이런 근거에서 강 감독이 진정 한국의 상업영화를 대표할 만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충무로 1인자’로까지 불렸던 그에게 그 누가 “요즘 감독님이 만드는 영화는 재미없고 지루해요”라고 말하기가 쉽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변화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진단하고 다시 스스로 일어날 길을 찾아낸다. 적어도 그는 영화 한두 편 성공시켜 놓고는 수년째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다음 작품에 뜸을 들이는 요즘의 ‘유식한’ 감독들과는 유전자가 다른 것이다. 그는 자신을 계속 시험대에 올리고 두렵지만 시장의 평가를 또 기다린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강 감독이 이끼를 둘러싼 인터뷰에서 유독 “관객이 두렵다”고 거듭 말하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이 말은 “관객 위주의 영화를 만들었어요”라는 하나 마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최근 강 감독이 걸어온 시행착오와 고민의 역사가 함축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영화 이끼에서 마을사람들을 신에게 인도하려는 유목형(허준호)이란 인물은 악의 표상과 같은 비리형사 천용덕(정재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두려움이 당신을 구할 것이오.”

강 감독을 구한 것은 관객에 대해 그가 진정으로 가졌던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역시 대형(大兄)은 다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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