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하정규] 미녀삼총사를 능가하는 할머니들 ‘육혈포 강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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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5일 15시 00분


할머니 강도단이 나타났다. 검은 복면이 아니라 우아한 스카프로 만든 복면을 하고 리볼버 권총을 휘두르면서.

힘없고 어설퍼 보이지만, 투지와 배짱만큼은 남부럽지 않다. 하지만 어쩌다가 할머니들이 은행 강도를 하게 됐을까?

'육혈포 강도단'은 사회가 고령화하면서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소외되기 쉬운 노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코믹 액션물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객석에서 쏟아져 나오는 폭소와 눈물 속에서 이 시대 어르신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평균나이 65세 할머니 은행강도단의 활약을 그린 코미디 영화 \'육혈포 강도단\'. 왼쪽부터 주연배우 김수미(손영희), 나문희(김정자), 김혜옥(공신자).
평균나이 65세 할머니 은행강도단의 활약을 그린 코미디 영화 \'육혈포 강도단\'. 왼쪽부터 주연배우 김수미(손영희), 나문희(김정자), 김혜옥(공신자).

▶ 미녀삼총사를 능가하는 할머니 강도단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가족과 이웃에게서 괄시와 냉대를 받는 세 할머니들(나문희, 김수미, 김혜옥 분)은 평생 이루지 못한 해외여행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동네 슈퍼에서 세 명이 역할 분담을 통해 교묘하고 익숙한 솜씨로 종업원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생필품들을 훔쳐 내어 길거리에서 또래 노인들에게 넉살 좋게 경매에 부쳐 판다.

하와이행 최고급 실버여행을 꿈꾸는 이들의 목표액인 팔백여만원이 드디어 수중에 들어오고, 이들은 들뜨고 기쁜 마음에 여행사로 달려가지만, 은행 송금을 요구하는 여행사 직원의 말에 따라 은행창구에서 입금하게 되는데, 입금 직전에 난데없이 나타난 은행 강도들에게 자신들의 금쪽같은 여행자금을 강탈당한다.

엄청난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한 이들은 스스로 범인색출에 나선다. 용케도 강도 일당 중 한 명의 용의자(임창정)를 붙잡지만 돈의 행방은 묘연하다. 젊은 시절 하와이로 입양 보낸 아들을 만날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하는 폐암 걸린 할머니를 위해 이들은 보다 '거대한' 범죄에 도전할 결심을 한다.

8년간 힘들게 모은 하와이 여행자금을 은행 강도에게 빼앗긴 세 명의 할머니 김혜옥, 나문희, 김수미.
8년간 힘들게 모은 하와이 여행자금을 은행 강도에게 빼앗긴 세 명의 할머니 김혜옥, 나문희, 김수미.

▶ 할머니 배우 3인방의 환상의 조화

오랜 연륜이 묻어나는 나문희, 김수미, 김혜옥 3인방의 조화는 환상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부이며, 생활고에 시달리고, 가족과 이웃에게서 구박과 소외를 당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개성이 뚜렷하다. 강단이 제일 센 욕쟁이 할머니 김수미와 아픈 과거를 가졌지만 억척스러운 나문희, 그리고 이중 제일 예쁘지만 겁이 많고 소심한 김혜옥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어설프지만 절박한 할머니 강도단을 만들어 나간다.

해외여행 자금을 마련하려고 슈퍼에서 3명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서 물건을 훔치는 장면은 기발하고, 훔친 물건들을 같은 또래의 노인들에게 경매로 판매하면서 또래 노인들 간에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이루는 장면은 흥미롭다.

할머니들이 과거와 인생에 대해 나누는 대화들도 진부하지 않고 실감나는 대사들이 많다. 은행 강도를 실행하면서 일어나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와 액션장면들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결국 할머니 강도단이 체포되고 폐암을 앓고 있던 나문희는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구금된 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장면이 지나치게 신파조로 흐르지 않은 점도 훌륭하다. '비온 뒤 흙냄새를 맡고 싶어….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던 유자차가 그렇게 좋았었는데…' 라는 마지막 대사는 잔잔하고도 구슬프게 가슴에 와 닿는다.

눈이 내리는 창밖의 풍경은 조악한 컴퓨터 그래픽 티가 나는 것이 흠이었지만, 코믹액션물이면서도 진부하지 않은 결말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할머니들은 은행을 털기로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전문은행강도(임창정)를 협박해 비법을 전수받기 시작한다.
할머니들은 은행을 털기로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전문은행강도(임창정)를 협박해 비법을 전수받기 시작한다.

▶ 구체적 과거사의 부족과 조연들의 부실함

하지만 아쉬운 대목들도 꽤 있다. 우선 여주인공 3명의 과거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상당히 부족하다. 개괄적으로만 언급될 뿐 구체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특히 젊은 시절 입양 보낸 아들을 만나러 하와이로 떠나야 하는 나문희의 경우 친구들에 의해 그 사정이 잠깐만 언급될 뿐이어서 절박함이 떨어진다.

회상 장면이나 꿈속에 아들을 그리는 장면 같은 것이 있었다면 관객들이 더 깊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혜옥을 구박하고 착취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아들, 며느리, 손녀에 이르기까지 실감 나는 대사와 연기가 확연히 떨어졌다. 평생을 바쳐 부양했던 자식과 가족들의 냉대와 이들로부터의 소외는 많은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이므로 이 대목이 보다 현실감 있고 밀도 있게 그려졌어야 했다.

그리고 은행에서 벌어진 인질극도 인질극 특유의 긴장감이 부족했다. 클라이맥스의 액션 부분은 좀더 과격하고 과장했어도 좋았을 성 싶다.

경매를 통해 만났던 노인들이 할머니 강도단을 도와주는 장면은 좋았는데, 이들 또래 노인들에게서 그간 가족과 사회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전 반적으로 볼 때 여주인공 3명의 훌륭하고 관록 있는 연기에 비해 조연들의 존재감과 연기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 '뭐 할머니? 이놈이 어디서~'

'육혈포 강도단'은 주변의 냉대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이상향을 찾아가려는 서글프고 절박한 할머니의 좌충우돌기를 그린 영화다. 가볍지 않은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신파에 빠지지 않고, 쿨하면서도 현실감을 잃지 않으며,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주어야 하는 것이 '육혈포 강도단'의 과제였다면 이 영화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둔 것 같다.

김 수미가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르는 젊은이를 향해 고래고래 욕을 퍼붓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누구나 늙었다는 얘기는 듣기 싫어한다. 가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면 유독 마다하거나 오히려 불쾌감을 드러내는 노인들도 있다.

세 계 최고의 속도로 노령화를 향해 내닫고 있으면서도 젊음과 외모를 나날이 중시하는 이율배반적인 사회. 이 와중에 노인들은 더욱 소외되고 냉대받기 쉽다. 사회환경이나 복지제도를 논하기는 너무 아득하고, 내 부모에게 잘해야겠다는 다짐부터 해본다.

작년에 칠순을 넘기신 아버지, 얼마 전에도 전화로 목소리를 높였던 이 철없는 중년의 아들을 용서하세요. 정말 죄송하고 앞으로 자주 전화 드릴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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