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김현진]스타일 인 셀럽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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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6일 11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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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클래식 VS 유러피안 럭셔리
오바마와 사르코지의 '패션 폴리틱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 미셸 여사는 지난 5월 연예잡지 '베니티 페어'가 선정한 옷 잘 입는 남녀 리스트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미 대통령이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는 이번이 처음. 퍼스트레이디로서는 미셸 여사가 로라 부시 여사에 이어 두 번째다.

2007년 이 잡지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그리고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으로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 카를라 브루니 여사를 베스트 드레서로 꼽기도 했다. 세계의 지도자 가운데 오바마와 부부와 사르코지 부부가 브래드 피트-안젤리나 졸리 커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퍼스트레이디가 한 시대 여성들의 패션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례는 적지 않다. '재키룩'이라는 신조어를 낳은 재클린 케네디가 대표적 사례이다. 미셸과 브루니 역시 그에 못지않은 패션 스타일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해 미국 대선 유세장에 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 미 서부 개척자 정신이 담긴 청바지는 경제 위기에서 미국과 세계를 구해내야 할 오바마의 사명과 잘 어울린다.
지난해 미국 대선 유세장에 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 미 서부 개척자 정신이 담긴 청바지는 경제 위기에서 미국과 세계를 구해내야 할 오바마의 사명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남성 대통령이 당대 남성들의 '패션 리더'가 되는 현상은 여전히 낯설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새 남성 대통령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지난 19일 한국을 찾은 오바마 관련 기사들 중 그의 패션 스타일을 분석한 기사가 상당수를 차지했다는 데서도 이 같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정치인의 패션' '패션을 통한 정치'라는 뜻의 '패션 폴리틱스(fashion politics)'. 바야흐로 '패션 정치학'이 꽃을 피우는 시대가 온 것일까.

'아메리칸 클래식'…명품-중저가 브랜드로 '균형' 잡는 오바마

패션지 '하퍼스바자' 미국판도 같은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지난해 미국 대선을 전후해 실은 특집 기사 '패션 정치학(The Politics of Fashion)'에서 도발적인 이슈를 제기한 것. '2008년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중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타일(style)인가 아니면 실체(substance)인가?'

이는 대선 기간 내내 후보들의 패션 스타일이 공약 이상으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는 뜻이다. 이 잡지는 '미국인들은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맞을 준비는 돼 있어도 뚱뚱한 대통령은 원치 않는다'고 지적했다. 현대 미국 사회에서 높은 공직에 오르려면 '두툼한 뱃살과 턱 살이 없을 것'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 물론 '시크한' 패션은 관리된 몸매에 패키지처럼 따라붙는다.

'하퍼스 바자'에 따르면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부터 젊고 매력적인 대통령 부부가 미국인을 사로잡는, '대통령'과 '스타일'의 강한 '연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치인의 스타일에 시선이 집중되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 때는 대선이 치러진 2008년이었다.

48세의 젊은 나이, 운동으로 다져진 몸, 187cm가 넘는 모델형 체구를 가진 오바마에 미국의 패션계는 유독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들은 아내 미셸처럼 오바마 역시 미국 패션 브랜드의 '홍보 대사'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정작 오바마 본인은 패션 또는 브랜드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의 어린 두 딸은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아빠의 패션과 스타일이 화제가 된다는 사실이 너무 우습다. 매일 같은 바지에 똑같은 벨트 차림인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바마 스스로도 "다른 많은 남자들처럼 나도 쇼핑이라면 질색이다"라고 밝힌바 있다.

그런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베스트 드레서' 대접을 받게 된 데는 즐겨 입는 브랜드들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올 1월 대통령 취임식 당시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부부. 오바마는 이날 미국 남성복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의 코트를 입고 같은 브랜드의 스카프와 장갑을 착용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도 좋아했던 브랜드이다.
올 1월 대통령 취임식 당시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부부. 오바마는 이날 미국 남성복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의 코트를 입고 같은 브랜드의 스카프와 장갑을 착용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도 좋아했던 브랜드이다.


오바마의 한국 방문 당시에는 이탈리아 명품 정장 브랜드 '카날리'가 화제였다. 이는 그가 대통령 취임식 하루 전날 열린 축하 행사 때 입은 그 브랜드다. 대통령 유세 때만해도 5~6벌의 중저가 정장 또는 청바지를 돌려 입던 오바마가 '영광의 날'에 어울리는 고급 브랜드를 선택했다는 것이 당시 미국 언론의 평가였다.

밀라노를 대표하는 최고급 남성 슈트 브랜드 '카날리'는 '최고의 위치에 오른 남성이 입는 옷'이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대기업 총수나 국가 원수들이 이 브랜드를 즐겨 입는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도 '카날리' 팬이었다. 그의 초호화판 궁전이 일반에 공개됐을 때, 옷장을 가득 채운 옷들 가운데 일부가 '카날리'였다. 오바마는 또 다른 최고급 이탈리아 브랜드 '브리오니'의 넥타이를 맨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런데 실업률이 두 자릿수에 육박하는 최악의 경제난에 값비싼 이탈리아제 명품 브랜드를 두르고 다니는 대통령을 호의적으로만 볼 수 있을까.

미국 언론은 대통령의 패션 스타일에 열광하는 사람들조차도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매력적이고 옷 잘 입고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기를 바라지만, 그들이 이를 위해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의 '페라가모' 구두 파문이 이러한 이중적 잣대를 잘 보여준다. 전 세계를 누비며 각국 정상을 만날 때 마다 과시했던 라이스 전 장관의 깔끔한 패션 매너는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자랑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06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뉴올리언스가 신음에 빠져 있을 때 그가 뉴욕 맨해튼에서 이탈리아 명품 '페라가모' 구두를 수천 달러어치 쇼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중의 태도는 돌변했다.

이런 이중적 잣대 속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이 '된장남' 취급도 비난도 받지 않았던 이유는 '균형감각' 덕분이다. 그가 평소 즐겨 입는 브랜드는 '하트 샤프너 막스(Hart Schaffner Marx)'다. 시카고에 본사를 둔 대중적 남성복 브랜드로 슈트 한 벌에 600~700달러대(80만원대)이다. 여기에 '나이키'의 트랙 슈트, '아식스'의 러닝슈즈 등을 즐겨 입고 신는 그의 모습에서 미국 서민들은 '나와 다를 바 없다'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가 올 1월, 대통령 취임식 때 입은 미국의 남성복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 역시 오바마의 '아이덴티티'와 잘 어울렸다. 그는 이 날, 1818년 설립돼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미국산 남성복 브랜드로 알려진 '브룩스 브라더스'의 코트를 입고 이 브랜드의 스카프, 장갑을 착용했다.

'브룩스 브라더스'는 흑인 노예 해방에 앞장 선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즐겨 입은 브랜드이다. 링컨 대통령 역시 취임식때 이 브랜드의 코트를 입었다. 코트 소매의 안쪽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과 '하나의 국가, 하나의 운명(One Country, One Destiny)'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오바마는 이 브랜드를 자신의 취임식 의상으로 선택함으로써 패션으로도 링컨의 정신을 계승한 셈이 됐다. 이 브랜드의 가격대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은 '미국의 전통 계승'이라는 명분에 가려졌다.

그가 선택한 시계도 젊고, 스포티하며, 역동적인 그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현재는 단종된 태그호이어의 '1500시리즈'인데, 그는 1991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1992년 결혼을 할 무렵 이 시계를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그호이어 역시 유명 고급 브랜드지만 '합리적 가격의 럭셔리(affordable luxury)'인데다 구입 후 20년 가까이 애용하고 있어 '안티'를 걸기가 쉽지 않다.

고급 브랜드와 대중적 브랜드를 교차 또는 조합함으로써 패셔너블하되 사치하지 않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오바마의 '패션 폴리틱스'는 그의 아내 미셸의 전략과도 일치한다.

시카고 출신의 디자이너 마리아 핀토와 대만계 이민자 출신 디자이너 제이슨 우의 디자이너 드레스를 입으면서도, 중저가 브랜드 '제이크루'의 의류와 액세서리를 즐기며 '믹스&매치'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 미셸이 '화려한 패셔니스타'와 '생각 있는 퍼스트레이디' 이미지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비법이다.

오바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패션 아이템은 역시 청바지다. 지난 해 대통령 유세 기간 동안에도 청바지 차림의 오바마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미국 서부 개척자 정신이 담겨 있는 청바지는 경제 위기 후 새로운 미국의 질서를 창조해 나가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띤 오바마의 운명과 잘 어울린다.

대선 유세장에서, 또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서 허리단을 배꼽 위로 끌어올린 '배바지' 스타일의 청바지를 입고 나온 그에게 기자들은 "패셔니스타 아내를 두고 왜 그런 옷을 입느냐"고 물었다. 그는 넉살좋게 "스키니 진이 어울리는 대통령을 기대했다면 미안하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리를 졸라매고, 허리춤을 바싹 끌어올린 청바지가 위기에 빠진 미국과 날로 떨어지는 그의 지지율을 바싹 끌어올릴 수 있을까. 오바마의 '패션 폴리틱스'는 그의 리더십 회복에 얼마나 도움을 줄 것인가.

캐주얼 차림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내외. 명품광으로 알려진 사르코지 대통령은 최근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청바지 패션은 '불황기에 땀흘려 일하는 젊은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캐주얼 차림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내외. 명품광으로 알려진 사르코지 대통령은 최근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청바지 패션은 '불황기에 땀흘려 일하는 젊은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유러피안 엘레강스'… 지지층 부르주아에 어필하는 사르코지

오바마 대통령과 더불어 베스트 드레서로 꼽히는 사르코지 대통령은 명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프랑스의 인기 여류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가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을 전후한 1년간 사르코지를 동행 취재해 저술한 사르코지 평전 '여명의 밤(Dawning Night)'에도 이러한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사르코지는 어느 날 이란의 정세와 자신을 다룬 뉴스를 1면에 실은 신문 '르 피가로'를 펼쳐들었다. 그런데 사르코지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해외 뉴스도, 정치 뉴스도 아닌 하단의 광고 비주얼이었다. 광고에 등장한 '롤렉스' 시계 사진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는 '야, 이거 참 근사하다!'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사르코지의 '롤렉스' 사랑은 크고 작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가 자주 차는 2000만원 상당의 금색 롤렉스가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좌파 정치인들과 언론으로부터 '블링-블링(bling-bling·번쩍대는, 화려한) 대통령'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올 초에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 광고계의 거물 자크 세겔라 사장이 TV 프로그램에 나와 한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통령의 블링-블링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남자나이 50세에 롤렉스 하나 못 차면 실패한 인생 아니냐"고 답한 것. 최고의 실업률과 경기 침체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프랑스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이 발언은 프랑스판 '루저의 난'이라 할만했다.

그런데 사르코지를 '블링-블링' 이미지에서 구해낸 이는 영민한 아내 브루니였다. 브루니는 결혼 선물로 최고급 시계 '파텍 필립'을 선물했다. 파텍 필립은 약 7000만원대로 롤렉스보다 훨씬 비쌌다. 그런데도 국민들의 반발이 덜했던 이유는 일단 이 브랜드가 잘 알려지지 않은데다 디자인을 보면 훨씬 더 검소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사르코지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프라다'의 정장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급스럽지만 상업적인 프라다의 이미지는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우파 정권을 원했던 부르주아 지지자들에게 어필했다.

대통령 취임식장에 들어서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이날 그가 입은 것으로 알려진 명품 브랜드 '프라다' 정장은 우파 정권을 원하는 부르주아 지지자들에 어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통령 취임식장에 들어서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이날 그가 입은 것으로 알려진 명품 브랜드 '프라다' 정장은 우파 정권을 원하는 부르주아 지지자들에 어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루이뷔통 그룹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 총수들과의 오랜 친분을 감안할 때 그가 프랑스 브랜드 제품들도 즐겨 입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2007년 프랑스 대선 당시 현지에 체류했던 필자는 주변의 부르주아 출신(또는 이에 필적하는 경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젊은 프랑스인 가운데 상당수가 사르코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그의 명품 패션 취향에 대해서도 '패션 감각이 있다'고 추켜세우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대통령이 '패션 리더'로 추앙받는 작금의 현상은 이변이 아니라 운명일지도 모른다. 패션의 발달사가 실은 권력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패션을 선도하는 럭셔리 브랜드들, 특히 프랑스 브랜드들이 현대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태양왕 루이 14세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명품 문화의 유래를 다룬 책, '디 에센스 오브 스타일'의 저자 조안 드잔은 "특히 1670년에서 약 30년 간, 최고의 화려함과 최고의 멋을 찾았던 루이 14세의 취향 덕분에, 패션을 필두로 보석, 음식, 실내 인테리어가 본격적으로 발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루이14세의 패션 스타일이 곧 귀족 사회와 그 아래 계층으로까지 빠르게 전파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프랑스 최초의 '트렌드 세터'는 왕이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루이 14세만은 못하더라도 남다른 취향을 가진 사르코지가 최근 가장 즐겨 입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는 오바마와 같다. 역시 청바지다. 최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청바지가 최고위급 정·재계 인사들의 평상복으로 각광 받고 있다고 전했다. 청바지가 '불황기에 땀 흘려 일하는 젊은 정치인의 이미지'를 선사하는 '효자' 아이템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인은 패션을 이용하고 패션은 정치인을 이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매커니즘은 스타일(style)과 실체(substance)의 구분을 어지럽힌다. 현대의 패션 마케터들이 서슴없이 말하는 '스타일이 곧 인격(personality)'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이 가져야 할 가치와 덕목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일까 아니면 '보는 대로 믿으라'일까.
김현진 동아일보 주간동아팀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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