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리뷰]‘농촌 드라마’ 배경만 농촌?

  • 입력 2009년 3월 30일 03시 05분


‘이스트엔더스(EastEnders)’라는 영국 BBC 드라마가 있다. 1985년 시작해 지금까지 방영하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이스트엔더스’는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에 사는 사람들. 서울로 치면 ‘강북’쯤 된다. 이곳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말 그대로 ‘서민 드라마’다.

국내에선 지상파 3사를 통틀어 서민 드라마를 내세운 작품은 KBS1 ‘산 너머 남촌에는’(수 오후 7시 반·사진) 한 편뿐이다. 2007년 10월 시작했으며 홈페이지에선 귀농 가족이나 베트남에서 온 신부 등을 통해 “농촌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내겠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취지를 얼마나 제대로 구현하는지는 의문이다. 25일 방영한 71화를 보자. 남편과 사별한 이장네 며느리 김승주(조은숙)와, 이혼한 뒤 삼남매를 데리고 귀농한 나진석(이진우)이 장에 갔다 돌아오다 우연히 마주친다.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둘은 인근 비닐하우스로 피한다. 이 모습이 우연히 마을 사람 눈에 띄어 오해를 낳고….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처럼 빗나간 핑크빛 스캔들이 한국의 ‘농촌 현실’과 얼마나 상관있을까. 시골에도 로맨스야 있겠지만, 한창 일손 바쁜 3월에 농사를 짓는 장면은 2∼3개에 불과하고 몇 초 되지도 않는다. 이날 방송은 농촌의 삶 대신 여느 드라마에서 흔한 남녀 갈등 포맷을 그대로 갖고 와 포장했을 뿐이다. 배경만 농촌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소문 하나를 두고 모든 마을 사람이 드라마 50분 내내 삼삼오오 모여 이리 옮기고 저리 따지는 모양새는 ‘소재의 빈곤’ 실태를 드러낸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농촌에서 일어날 만한 에피소드가 여러 개 이어져야 한다. ‘산 너머 남촌에는’은 농촌의 현실도 담지 못했고, 극적 재미도 주지 못했다.

‘이스트엔더스’는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영국 드라마 시청률 상위권에 올라 있다. 그 생명력은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와 아기자기한 스토리 덕분이다. ‘산 너머 남촌에는’에 대해서는 저조한 시청률과 수익성 문제로 폐지가 거론된다고 한다. 하지만 시청률 등을 거론하기 이전에 제대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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