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관극장은 The End...추억은 To be Continued...

  • 입력 2007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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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닫는 前화양극장 드림시네마 20년 전 영화로 마지막 상영

#1 6년만에 간판 준비하는 1층 작업실

“서운한 마음이야 벌써 예전에 졸업했지”

4일 오후 1시 극장 구석 작은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들어갔다.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고 벽의 거미줄이 바닥까지 늘어질 것만 같다. 이곳에서 극장 간판 화가 김영준(51) 씨는 23일 20년 만에 재개봉하는 ‘더티 댄싱’의 간판을 구상하고 있다.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단관극장인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드림시네마는 주변의 재개발 때문에 이 영화를 끝으로 사라진다.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고 영화도 공짜로 보여 줘서” 시작한 일, 30여 년간 1000여 개 간판을 그렸지만 실사 출력이 대세가 되면서 이번 일은 근 6년 만의 작업이다. 게다가 가로 3m, 세로 2.4m의 간판을 8개 이어 붙이는 대규모 작업이라 ‘국내 최고’라는 그도 신경이 쓰인다.

영화 스틸 사진을 보던 그가 몇 장을 골라 종이에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이 스케치를 캔버스에 옮겨 그린 뒤 채색하려면 앞으로 일주일쯤 걸린다.

“한창때는 밤샘 작업해서 2, 3일 만에 그리기도 했지. 1980년대에는 수입이 짭짤했어요.”

‘영웅본색’에서 선글라스 쓰고 성냥개비를 물고 있던 ‘주윤발(저우룬파)’을 그린 것이 최고 히트작이었다. 그림도 잘 나왔고 관객도 많았다. 가장 즐겨 그린 배우는 실베스터 스탤론. 얼굴의 윤곽과 몸의 근육이 뚜렷해 그리기도 쉽고 다 해 놓으면 ‘폼’도 났다.

“간판이 ‘극장의 얼굴’이었어요. 간판을 올릴 때면 영화사 대표 등 모든 사람이 나와 지켜봤으니까. 요즘 실사 출력한 것은 그림보다는 강한 맛이 떨어지지.”

의뢰가 끊긴 이후엔 지방에 벽화를 그리러 다닌다. “서운한 감정은 벌써 예전에 졸업”했고 오랜만의 작업이 기쁘기만 하다. 예전 동료들도 서로 도와준다고 난리다. 이번 간판은 어쩌면 그의 마지막 작품, 그리고 마지막 단관극장 드림시네마의 최후를 함께할 간판이다.


▲ 동영상 촬영 : 이훈구 기자

#2 ‘더티 댄싱’ 시험상영 중인 극장안

“이런 이벤트라도 안하면 울게될 것 같아요”

1일 오후 4시 손님이 한 명도 없는 극장 안. 스크린에선 ‘더티 댄싱’이 시험 상영되고 있다.

1964년 개관한 드림시네마는 ‘화양극장’이라는 이름으로 1980년대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 홍콩 영화 개봉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1998년에 드림시네마로 개명했지만 극장들이 멀티플렉스화되면서 업계 용어로 말하자면 ‘날개관’(손님이 안 오는 변두리 극장)으로 전락한다.

영화기획자로 일하던 김은주(33) 대표는 2004년 이 극장을 인수해 ‘시사회 전용 극장’으로 만들었다. 작은 스크린의 여러 개 관을 가진 멀티플렉스가 대세인 요즘, 700명 이상이 초대형 스크린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흔하지 않다. ‘관객의 반응이 잘 보이는 곳’이라는 입소문이 나 한 달에 60여 차례의 시사회가 열렸다.

“이상해요. 강남에서 하면 반응이 썰렁한 영화도 이곳에선 군중 심리 때문인지 5번 웃을 걸 10번 웃죠. 배우들도 여기서 무대 인사를 하면 그 열기를 잊지 못해서 자꾸 와요.”

운영상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다. 건물주에게서 건물이 헐리니 이전을 준비해 달라는 내용증명을 받았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한 김 대표가 마지막 단관극장의 추억을 관객들과 함께하고 싶어 생각해 낸 영화가 1987년 흥행작 ‘더티 댄싱’.

“당시 중학생이어서 극장에서 세 번 쫓겨난 뒤 재개봉관에서 봤죠. 마지막에 패트릭 스웨이지가 무대에서 객석으로 뛰어내리는 장면, 정말 ‘확 도는 느낌’이었어요.”

그때는 ‘연소자 관람 불가’였지만 이번엔 ‘15세 이상’.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그러나 그는 관객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20년 전과 같은 3500원의 관람료를 받는다. 그는 ‘폐관’이라는 단어를 거부한다.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 ‘폐관’이라는 기사가 나갔더니 이 극장만의 회원 카드인 ‘하베스트 카드’ 회원(총 5000여 명)에게서 전화가 빗발쳐 업무가 마비됐다. “이런 이벤트라도 하지 않았으면 나가는 날 울었겠죠. 이젠 웃으면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날짜가 정해지면 그날부턴 아예 공짜로 상영하려고요.”

웃으며 말했지만, 목이 메어 있었다.

#3 오랜만에 필름 작업 바쁜 3층 영사실

“23년된 영사기 이 친구도 보내긴 보내야지”

1일 오후 6시 비좁은 영사실로 들어갔을 때, 영사기사 이길웅(67) 주임은 방금 상영한 ‘더티 댄싱’의 필름을 되감고 있었다. 영사실에서 보낸 시간이 53년, 그중 30년을 목포극장에서, 23년을 이곳 드림시네마에서 일했다.

“아, 서운하지. 식구들과 보낸 시간보다 여기서 일한 시간이 더 많은데…. 제일 아까운 것이 이 기계(영사기)예요. 내가 여기 올 때 수입해 들여와 나랑 23년 같이 일했지. 친구도 보통 친구가 아니여. 이제 다른 데서는 안 쓰는 기계니까 떠나면 버려야 하는데….”

“공부는 좀 하다 말고” 10대 초반부터 영사실에서 평생을 보냈다. 밤낮 일만 하느라 별다른 추억도 없단다. 왜 이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아, 좋으니까 한 것이지. 영화가 얼마나 재밌어요. 그때는 이 일이 최고였어, 최고.”

옛날에는 한 편을 상영하면서 필름을 여러 번 갈아 끼워야 했고 필름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영사기에 필름이 걸리고 불이 붙기도 했다. 정전도 자주 났다. 지금 같으면 환불 소동에 난리가 났겠지만 그때 관객들은 그냥 조용히 영화가 다시 상영되기를 기다렸다.

지금은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그는 한결같이 조바심을 내며 스크린을 주시한다.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될 ‘더티 댄싱’이 끝나고 극장이 없어지면 뭘 할 거냐고 물었다. 시사회를 위해 필름을 거느라 정신이 없는 그는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서는데 그가 나직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떠나긴 떠나야지….”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dongA.com에 동영상

■1987년 최고 히트 ‘더티 댄싱’

관객 몰려 무대 뜯고 자리 만들기도

1963년 여름, 보수적인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17세 소녀 베이비(제니퍼 그레이)가 댄스 강사인 조니(패트릭 스웨이지)에게 춤을 배우며 사랑에 빠지는 댄스영화.

1987년 개봉 당시 세계적 붐을 일으키며 수많은 아류작을 양산했고 특히 주제곡 ‘타임 오브 마이 라이프’ 등이 수록된 OST는 빌보드 음반 차트에서 18주간 1위를 기록하며 전 세계적으로 4300만 장이 팔렸다. 그 열기는 당시 암울했던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개관에서 단독 개봉하는 시대였던 당시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했으며 이후 명동극장과 크리스탈극장(현 그랜드 시네마)에서 재개봉했다. 관객이 너무 많아 크리스탈극장에서는 스크린 앞의 무대를 다 뜯고 의자를 더 놓았을 정도. 주인공 베이비의 하얀 운동화, 하이 웨이스트에 밑단을 접은 청바지가 거리를 휩쓸었다.

영화평론가 박유희 씨는 “무척 정치적이었던 시대, 노골적인 제목과 야한 춤의 ‘더티 댄싱’은 관능에 관대하지 않았던 한국 관객들에게 기존 질서와 다른 역동적 에너지를 선사한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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