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내 마음속의 2005년 영화, 그리고 대사

  • 입력 2005년 12월 22일 03시 01분


코멘트
《지난 1년간 200편 남짓한 영화를 보면서 깨알같이 메모한 수첩들을 살펴본다. 대종상, 청룡영화제, 대한민국영화대상, 춘사영화제…숱한 영화제가 지나갔지만 내 마음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은 영화는 별도로 존재한다. 올해 깊은 인상 혹은 생채기를 남긴 영화 및 대사를 꼽아본다.》

1. 최고의 대사

우선 ‘웰컴 투 동막골’①. “뱀이 깨물면 마이 아파” “니들 친구나?” “내 좀 빨라” “우리 마을에 미친년이 너 말고 여러 개 있나”처럼 위트 넘치면서도 가슴 찡한 강원도 사투리를 남겼다. ‘말아톤’은 “초원이 다리는?”(엄마) “백만 불짜리 다리”(초원) “몸매는?”(엄마) “끝내줘요”(초원)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는 “너나 잘하세요”로 진한 인상을 심었다. 이 밖에 다음 대사들도 빛났다.

“여자친구 사랑하세요?” “그냥 자식 같고 누나 같고 그래요.”(‘연애의 목적’ 강혜정과 박해일)

“우린 지나간 날들을 반성하지 않았고 내일을 걱정하지도 않았다.”(‘태풍태양’ 내레이션)

“미더덕 씹는 소리 하고 앉아있네.”(‘마파도’ 김수미)

“포경수술 안 한 어른 거 처음 봤어. 예뻐.”(‘사랑니’ 김정은)

“범인이 너무 잡고 싶으면 눈물이 나. 계집애도 아닌데 그냥 눈물이 나.”(‘강력 3반’ 허준호)

“그녀와 잘수록 소유할 수가 없어. 너무 섹스해서 소유할 힘이 없어.”(‘권태’에서 17세 누드모델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40대 철학교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이 아니니까 변하지.”(‘광식이 동생 광태’ 봉태규와 김아중)

2. 가장 황당한 배우의 코멘트

32세 이혼녀와 19세 총각이 그리는 애욕의 소용돌이를 담은 영화 ‘녹색의자’②. 이 영화의 기자시사회가 끝난 뒤 여배우 서정은 이렇게 말했다. “정사 신 그렇게 야하지 않거든요. (정사보다는) 사랑이란 데 포커스가 맞춰졌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영화 속 정사 장면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던지면서 총각의 귀를 깨문다. “서둘지 말고, 조금씩 움직여. 아냐. 너무 빨라. 천천히. 너무 경직되지 말고…. 오, 그래. 온몸을 나한테 맡겨.” 이게 야하지 않다면 하늘 아래 무엇이 야할까.

3. 가장 ‘닭살’스러운 대사

송혜교 차태현 주연의 ‘파랑주의보’③. 귀엽고 순수한 체하느라 정신이 없는 ‘파랑주의보’는 느끼한 대사들의 반상회 같은 영화다. “비가 그쳤네?”(수호) “태풍의 중심에 있으면 비도 없고 바람도 없는 고요뿐이래. 아, 너무 아름다워. 이런 걸 볼 수 있는 거, 어느 정도의 확률일까?”(수은) “너랑 나랑 만난 건 몇 만분의 확률일까?”(수호) “태풍 한가운데 별이 떠있을 만큼의 확률.”(수은) “나 결심했어. 너 때문에 울고 너 때문에 웃고 너 때문에 살 거야.”(수호)

4. 가장 철딱서니 없는 영화

단연 15세 중학생 남녀의 임신과 출산을 담은 영화 ‘제니,주노’④다. ‘전교 5등’ 하는 여자 반장 제니와 잘나가는 학생 게이머(gamer) 주노가 치는 일생일대의 ‘사고’를 다룬 이 영화는 ‘아기수호 감동 프로젝트’라는 기상천외하게 깜찍한 홍보문구로 포장했다. 임신 사실에 기겁을 하는 부모를 향해 “저흰 공부도 하고 아이도 낳을 거예요” 하고 의연하게 맞서는 제니와 주노는 무슨 소꿉놀이처럼 출산을 한다.

5. 가장 비현실적인 대사

배용준 손예진 주연의 ‘외출’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서영) “어떤 계절 좋아해요?”(인수) “봄요. 인수 씨는요?”(서영) “저는 겨울 좋아해요.”(인수) “저도 눈을 좋아해요.”(서영) “봄에 눈이 내려야겠네요.”(인수) 바람난 유부남 유부녀가 방금 호텔에서 나와서 이런 서정시 같은 대화를?

6. 가장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대사

일본 멜로 영화 ‘도쿄 타워’에서 35세 유부녀가 열네 살 어린 총각에게 속삭이듯 내뱉는 대사. “저녁밥 만들어야 해서 지금 들어가야 해.” 또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⑥에서 엄지원이 구사하는 “이러다 우리 사고 내겠다. 내가 너 첩 해줄까?”도 뒤지지 않는다.

7. 가장 무서운 영화

태국 공포영화 ‘셔터’⑦. 별다른 잔재주를 피우지 않은 채 △산발에 소복차림을 한 처녀귀신(비주얼) △사진에만 덜컥 찍히는 원혼(모티브) △성폭행 당한 처녀귀신의 복수(사연)라는 ‘전설의 고향’풍의 기본설정을 충실히 밀고 나가는 이 영화는 기본기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이 영화의 백미는 무심코 거울을 본 주인공 남자가 처녀귀신이 자기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담은 라스트 신. 길거리를 걷다보면 “도를 아십니까. 뒤에서 보니 어깨에 동자가 앉아 계시네요” 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자칭 ‘도인’들의 ‘필살기’를 떠올리게 한다.

8. 가장 상투적인 대사

우선 “돈이 삶의 전부는 아니잖아?” “난 그깟 보물보다 당신이 더 중요해” “사랑하고 보물 중에 뭘 택할 거야?” 하며 판에 박은 듯한 대사들을 기관총처럼 쏴대는 영화 ‘블루 스톰’이 떠오른다. 절체절명 긴장의 순간마다 주인공이 “내 코끼리 내놔!”를 연거푸 외쳐 코웃음을 치게 만드는 ‘옹박2’도 빼놓을 수 없다. 청룽의 영화 ‘신화’에서 별안간 등장해 “온정을 베풀려 했더니만 벌주를 내려야겠군. 진격하라!”고 외치는 최민수의 대사도 강적(强敵)이다. ‘공공의 적 2’⑧에서 검사 역을 맞은 설경구의 대사도 ‘배달의 기수’ 버금간다. “검사가, 대한민국 검사가 공공의 적을 세워두고 누울 수 없거든.”

9. 최고의 보디라인

라면 집에서 라면 먹던 남자 두 명과 생판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2+1’ 섹스에 돌입하는 영화 ‘가능한 변화들’ 중 ‘라면 먹던 아가씨’가 침대에서 보여주는 육중하고도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한 엉덩이는 ‘올해의 라인’이다. ‘블루 스톰’⑨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해저를 누비는 제시카 알바가 보여준, 낙천적이면서도 영양이 고루 축적된 아랫배도 수준급. “너무 노출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았으면 한다”는 성현아의 부탁과는 달리 노출에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영화 ‘애인’에서도 ‘유소유 무소무(有所有 無所無·있어야 할 데는 있고 없어야 할 데는 없는)’의 정신을 실현하는 ‘미니멀’한 성현아의 몸매를 목격할 수 있다.

10. 가장 절절한 대사

남편을 여읜 60대 후반 여성 ‘메이’가 딸의 애인인 ‘대런’과 눈이 맞게 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 ‘마더’⑩에서 메이가 대런과 성관계를 가진 뒤 울먹이며 토해내는 말. “다신 누구도 내 몸을 안 만질 거라 생각했어요. 장의사 빼고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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