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기자의 글 전문

  • 입력 2005년 3월 11일 15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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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상호 기자의 글 전문.

지난 1월초 세칭 ‘명품 핸드백 파문’으로 회사를 떠난 뒤, <사실은>이 있던 ‘보도제작국’에서 특별히 하는일 없이 부유하기를 두 달. 지난 주말이 되서야 정기인사를 거쳐 ‘보도국’으로 복귀했다. 횟수로 6년, 만 5년만의 귀향이다.

굳은 표정의 선배들, 뭐라 말을 붙혀야할지 어색해하는 동기들, 그리고 알듯말듯한 얼굴의 후배들..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응시해도 불편한 등에선 식은 땀이 흐른다. 낯선 공기와 눈초리들.

나의 보직은 라디오뉴스부의 피디. 시간마다 표준 FM의 정시뉴스에 내보낼 기사를 고르고 또 그 순서를 정해주는 일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져먹고 모니터 속의 기사에 집중해보지만 영 기사가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라디오뉴스부의 선임자인 이용마씨가 편집요령에 대해 조근조근 강의를 시작한다. 연신 고개를 흔들며 나의 손은 그의 말을 따라 적기 바쁘다. 7시뉴스, 8시 뉴스의 광장, 12시 종합뉴스, 2시 뉴스의 현장...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오늘은 일요일. 단독으로 라디오뉴스를 편집하는 첫날이다. 휴일인 만큼 뉴스도 많지 않고, 리포트 보다 스트레이트 기사 위주로 평이하게 진행하면 된단다. 하지만 이게 웬걸? 밤사이 영동지방 일대를 중심으로 경상도 해안과 산간지방에 까지 큰 눈이 내렸다. 부산은 104년 만의 최대 폭설을 기록했단다. 지방사 리포트를 생방으로 연결하고, 리포트 완제품을 붙히고.. 혼자 이리뛰고 저리뛰며 뉴스를 때웠다. 여야 빅딜설을 비롯한 정치권 뉴스와 한승조 교수 파문 등 꼬리를 무는 뉴스들을 오가다보니 일요일이지만 그런대로 뉴스의 틀을 갖춘 것 같다.

새벽에서 낮으로, 다시 저녁 무렵이 되서야 비로소 하루가 지났음을 느꼈다. 보도제작국에서 일주일을 단위로 바삐 돌아온 지난 5년간의 시간들. 이곳 보도국에서는 모두가 ‘ 하루를’ 승부하며 이렇듯 분초를 살아왔구나. 저마다 등을 돌린 채 무언가 골똘하고 있는 동료들의 어깨가 대견해보인다. 그래 나는 다시 뉴스의 산실로 돌아온 것이다. 비록 이곳까지 여행이 순탄치 만은 않았지만..

새로운 한주가 시작됐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라디오뉴스를 편집하는 일이 의미있는 일이 되도록 나는 나름대로의 목표들을 세우기로 했다. 기존의 뉴스를 읽어보다 마주친 기사 하나 때문이었다.

“.. 미국은 리비아가 북한산 우라늄을 사용한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는 조사결과를 일본측에 전달했다고 아사히 신문이 일본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북한이 우라늄을 리비아에 수출했다는 전제하에 쓰여진 전형적인 ‘과잉 인용’ 기사였다. 미국이 ‘증명했다’는 말을 들은 ‘익명의’ 일본관리의 말을 근거로, 한 보수적 일본 신문이 ‘작성한’ 기사를 충분한 확인과정 없이 다시 연합뉴스가 ‘번역’ 소개한 글이었다. 미국 중심의 정보체계가 그 하부구조인 일본의 언론 매커니즘을 거쳐, 반도의 유일 뉴스도매상 연합을 통해 직수입된 것이다.

2단계, 3단계를 거치면서 하나의 펙트(사실)로 굳어진 이 정체불명의 기사가 티비와 라디오를 통해 국민들에게 이미 퍼진 것이다. 이러한 기사들이 오랜시간 우리들의 뇌리에 축적되면서 결국 오늘날 우리들의 인식체계와 국제정세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 것이리라. 기사를 좀 더 읽어보자.

“이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1월말 일본을 방문한 마이클 그린 미국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선임국장은 ‘북한이 리비아에 농축 우라늄의 원료인 6불화 우라늄을 판매한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고 말했습니다.”

뭐 이렇게 전개된다.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강제’되는 맹신. 참으로 오랜 시간 우리가 앓아온 병이다. 그나마 과학적으로 어떻게 증명됐다는 최소한의 입증과정도 없이 그저 ‘과학적으로 입증’됐으니 믿으라는 이 백색 테러! 이를 전해들은 일본 관리가 전하는 말로 작성한 기사를 국내에 후하게 소개한 뉴스통신사의 기자도 문제지만 별생각 없이 기사를 그대로 받아서 보도해온 우리의 뉴스 ‘편집 관행’도 문제다. 사대적이고 관행에 젖은 편집관행은 이제 종언을 고해야 할 때다. 라디오뉴스부에 근무하며 고민하고 실천해야할 작은 목표다 - 민족관점의 주체적 뉴스의 회복!! 알량하나마 작은 다짐을 찾아내자 살포시 일에 대한 활력이 솟는다. 몇달 만에 느껴보는 내 안의 삶의 의지인가.

다시금 올라온 기사들을 살펴본다. 이제 보니 전과 다른 새로운 각도의 스트레이트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중국 전인대를 맞는 리샤오핑 외교부 대변인이 6자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당사자’인 북-미간의 직접 회담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는 기사다. 요 며칠동안 중국 외교부 한반도 담당자들이 잇따라 북-미간 직접 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가운데 나온 괄목할 만한 멘트였다. 물론 미국은 중국의 이니셔티브를 되받아 중국의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뒤로 빠지겠지만 말이다.

한반도 문제의 국제적 해소과정이 교착된 가운데 중국의 당사자 직접 회담 제의는 대단히 참신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어느 한곳 신문과 방송에서도 중국의 전향적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주목해주지 않았다. 미국에 의해 구축된 한국인의 국제정치적 정체성이 반영된 결과다. 미국적 이미지에 눌린 한국적 외신읽기의 결과일터.

취재 담당이 아닌 나는 라디오뉴스의 편집자. 중국의 주장이 갖는 전략적 함의와 그 배경, 그리고 향후 동북아 새질서 형성과정에 있어서의 의미를 생각해보다 졸린 한 나절을 비틀거린다. 게으른 편집자의 눈을 띄워줄 참신한 기사 하나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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