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기현/백건우-윤정희 부부의 분노

  • 입력 2003년 5월 4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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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대문도 없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나라 같아요.”

왕년의 ‘은막의 여왕’ 윤정희(尹靜姬·58)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윤씨는 러시아 부활절 축제에 초청된 재불(在佛) 피아니스트인 남편 백건우(白建宇·57)씨와 함께 모스크바에 왔다. 백씨는 2일 차이코프스키음악원 대공연장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1000여 객석이 꽉 차고 암표까지 나도는 등 성황이었다.

3일 기자들과 만나 전날의 공연에서부터 두 사람의 일상생활까지 자세히 털어놓던 백씨 부부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1977년 일어난 납북(拉北) 미수 사건으로 화제가 옮겨지면서부터였다.

백씨 부부는 “지금도 수상한 전화를 받거나 주변에 이상한 동양인만 봐도 긴장된다”며 후유증을 호소했다. 백씨 부부는 당시 자신들을 공산국가였던 구유고까지 유인하는 등 납치에 가담한 의혹을 받고 있는 박모씨(77·여)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격앙했다. 백씨 부부가 어머니처럼 따랐던 박씨는 유고까지 동행했다가 파리로 돌아온 후 수상한 행적에 대한 의심을 받자 백씨 부부와 연락을 끊었다.

당시 박씨는 사건 직후 한동안 잠적해 우리 공관과 현지 경찰의 수사 협조 요청도 거부했으며 지금까지도 공식적인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 후 한국 입국이 금지됐던 박씨는 결국 한국 국적을 버렸다.

그러나 30여년 동안의 해외생활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백씨 부부는 박씨가 언제부터인가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

백씨 부부는 “미술가인 박씨가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청와대로부터 초청까지 받았다”며 “당시 국가정보원장을 만나 이를 항의했으나 박씨는 여전히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들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도 박씨가 한국을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일본 NHK 방송은 최근 납북 일본인 문제에 관심이 모아지자 백씨 부부 사건을 재조명하는 특집방송을 제작 중이다.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수교협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자국민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국가 존립의 기본이다. 백씨 부부와 같이 세계적인 유명인사들마저도 본국 정부의 보호막을 미덥지 않게 생각한다면 ‘보통 교민’들의 심정은 어떨까.

26년 전 박씨의 국내 출입을 금지시켰던 정부 당국이 박씨의 자유로운 서울행을 허용한 것이 박씨의 혐의가 풀려서인지 명확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김기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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