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미녀와 마녀

  • 입력 2002년 8월 12일 18시 11분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엄청나게 뚱뚱한 여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귀네스 팰트로가 미국 TV에 나와 한 말이 있다. “길에서 사람들한테 뭘 물어보려고 했는데 하나같이 본척만척하는 거예요. 분장한 차림이었거든요.” 그 예쁜 여배우는 비만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그렇게 심한 줄 몰랐던 모양이다. 남녀차별이니 인종차별이니 해도 용모차별 또는 외모 지상주의(루키즘·lookism)만큼 심한 게 없다는 것이 겪어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뚱뚱한 사람은 친구가 적고 게으르며 덜 지적으로 여겨지는 반면 몸매 좋은 사람을 그 반대로 본다는 건 사회심리학 책에도 빠짐없이 언급되는 ‘고정관념’이다. 칼릭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외모가 매력적이면 사회적 성공도 함께 누릴 것이라고 간주된다”고 밝혀냈으며, 예일대 심리학교수인 마리안 라프랑스는 “긴 금발 생머리의 여자가 더 지적이고 섹시하며 돈과 권위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 여성들도 ‘용모가 인생의 성패에 크게 작용한다’고 믿는다는 조사가 나왔다. 성형수술 중독증에 걸릴 만큼 용모에 ‘목숨’을 걸고, 해로운 약을 먹어가며 살을 빼려 들어 타임지에까지 회자되는 것이 현실이다.

▷‘외모가 경쟁력’이라는 여성들의 믿음을 허영심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미모가 맞선은 물론이고 취업과 사회생활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작용하는 게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경제통계연구소에서 내는 학술지에 따르면 뚱뚱한 여자는 월급도 더 적다. 올 봄 미국에선 얼굴 주름살 제거용으로 쓰이던 보톡스를 성형수술용으로 써도 된다는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이 떨어지자 보톡스가 ‘제2의 비아그라’가 될 것이라고 들끓었다. 여성의 평생 무기는 미모와 젊음이며, 이는 돈과 시간 여유가 있는 계층이라면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됐음을 말해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제 와서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하고 노래 불러봤자 흘러간 가요일 뿐이다. 본인이 원하고 감당할 능력만 있다면야 예뻐져서 나쁠 것도 없다. 다만 살갗만큼 얄팍한 미적 기준이나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의 잣대에 흔들리는 게 옳지 않다고 믿는다면, 백설공주처럼 쓰러져 죽기 직전까지 왕자의 입맞춤만 기다릴 수는 없다. 차라리 ‘마녀 선언’을 해버리면 어떨까. 이 글에 필자 사진이 안 나가서 하는 말이지만, 남의 눈에 평생이 좌우되는 미녀보다는 내 손으로 내 운명을 개척하는 마녀의 삶이 훨씬 재미있을 텐데.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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