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영화]송영언/흑인배우

  • 입력 2002년 3월 26일 18시 27분


벌써 몇십년 전 일이다. 흑인 여배우가 미국 할리우드의 한 호텔에 들었다. 그녀는 당시만 해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까지 오른 배우였다. 수영을 하기 위해 호텔 수영장으로 들어가려다가 종업원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였다. 화가 난 그녀는 발로 수영장 물을 몇 차례나 휘저은 다음 호텔방으로 올라갔다. 호텔방에서 수영장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종업원들이 수영장의 물을 빼고 있었던 것이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남달리 심한 미국에서 흑인배우들의 설 땅은 좁았다. 흑인들이 영화의 주요배역을 맡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설사 맡아도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극중에서 흑인과 백인배우가 서로 러브신이나 키스신을 펼치다 백인관객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독특한 연기와 특유의 매력으로 자신의 위치를 구축한 흑인배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백인들의 거부감은커녕 흥행의 보증수표가 된 배우도 있다. 이제 상당수 감독들은 흑인팬들을 생각해 자신의 작품에 꼭 흑인배우를 등장시킨다. 이러다 보니 외화를 볼 때마다 흑인배우가 들어가지 않은 영화는 무엇인가 빠진 것처럼 어쩐지 싱겁게 느껴진다.

▷흑인배우가 아카데미 74년 역사상 처음으로 남녀주연상을 나란히 받았대서 화제다. 남자배우로는 1963년 시드니 포이티어에 이어 39년만이고 여자배우는 상이 만들어진 후 처음이다. 흑인이라는 장벽을 뚫고 여기까지 온 두 수상자의 얘기가 가슴 뭉클하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할 베리는 “이제 흑인여배우들을 위한 문이 열렸다”며 울먹였다. 남우주연상을 받은 덴젤 워싱턴은 “포이티어를 쫓아 40년을 달려왔다. 오늘 인생은 내가 최선을 다하면 결국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며 감격했다.

▷어쩌면 덴젤 워싱턴의 뇌리에는 버지니아의 한 주유소에 들렀다가 화장실도 못쓰고 쫓겨났던 일, 여행지 명소에 접근도 못해 자동차안에서 도시락을 먹었던 일, 택시조차 잡기 어려웠던 일, 그리고 이 같은 응어리를 풀기 위해 백인배우보다 몇 배나 치열하게 살았던 지금까지 삶의 궤적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울먹이고 감격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편견으로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훌륭한 연기지 피부색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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