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평민으로 돌아간 궁예·왕건·견훤 "갑자기 실업자 된 기분"

  • 입력 2002년 2월 24일 17시 25분


《24일 끝난 KBS1 대하사극 ‘태조 왕건’의 주역 서인석(견훤) 김영철(궁예) 최수종(왕건)은 최근 종영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뜨겁게 포옹했다. 지난 2년 동안 드라마에서 권력 다툼을 벌여온 이들에게 끈끈한 전우애마저 느껴졌다. ‘태조 왕건’이 이들의 연기 인생과 삶에 던진 의미는 무엇일까? 제왕에서 ‘평민’으로 돌아간 이들에게 각각 들어 봤다.》

# 가족, 그리고 아내

△김영철(이하 김)〓이 드라마를 찍으면서 ‘빵점 남편, 빵점 아빠’가 됐어요. 일주일을 꼬박 일에 매달렸고 집에 돌아와서는 사극의 감각이 무뎌질까봐 되도록 말도 안 했으니까.

△최수종(이하 최)〓그나마 하루 쉬는 일요일에도 가족에게 소홀했던 게 참 미안해요. 일요일 새벽에 촬영 마치고 돌아오면 축구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었어요. 눈뜨면 바로 축구하러 나갈 수 있게.(그는 ‘일레븐’ 연예인 축구단 단장으로 축구광이다.) 아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하더군요.

△김〓그래도 드라마 찍으면서 가장 큰 힘이 돼준 건 가족, 특히 아내였어요.(아내 이문희는 탤런트로 활동하다 결혼 후 그만뒀다) 지방 촬영을 갈 때마다 옷가지 속에 편지를 끼워넣는 일을 잊지 않았으니까요.

△서인석(이하 서)〓너무 고생스러워서 이 드라마 끝내고 당분간 쉬겠다고 하니까 우리 아내가 그래요. “배우가 무대를 떠나면 안된다. 쉴 궁리 말고 열심히 하라”고. 무지 야속하대.(웃음) 하지만 냉정한 채찍질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한 원동력이었어요.

△최〓둘째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안돼 촬영이 시작돼 얼굴 볼 시간이 없었어요. 두 살배기 둘째가 나를 낯설어할 때 정말 가슴이 아팠죠.

김영철
빵점남편-빵점아빠
그래도 가족이 큰 힘
최수종
한동안 쉬고 싶지만
월드컵덕에 또 바빠
서인석
데뷔후 가장 힘들어
막상 끝나니까 허전

# 고생, 그리고 보람

△최〓매번 본드로 수염을 붙이고 석유로 지우는데다 하루 2∼3시간씩밖에 잠을 못자 피부가 말이 아니었어요.(가까이 본 그의 얼굴엔 기미와 검버섯이 피었을 정도다.) 왕건에 어찌나 몰입했던지 자다가 갑자기 대사를 외쳐 아내가 깜짝 놀란 적도 많았죠.

△서〓75년 데뷔 이래 이렇게 고생한 드라마는 처음이에요. 이 드라마 하면서 5년은 늙은 것 같아. 나중에는 연기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노동법을 위반해도 한참 위반했지.(웃음) 드라마가 성공을 못했으면 중간에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어요.

△김〓일주일에 세 번씩 삭발하지, 한쪽 눈은 안대로 가리고 있지…. 참, 나.(어이없는 표정) 지난해 5월 드라마에서 빠진 뒤 ‘태조 왕건’을 딱 세 번 봤어요. 출연자나 스탭들이 고생하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서 볼 수가 없더라고.

△서〓그래도 한 초등학생 팬이 “목 쉬지 않게 조심하라”며 사탕 한 봉지를 소포로 보내왔을 땐 정말 연기할 맛이 나대요. 하도 선물이 많이 답지하니까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집 우편물만 따로 관리를 해줬어요.

# 권력의 맛, 그리고 현실

△서〓드라마이긴 해도 권력의 맛이란게 정말 달콤합디다. 내 한마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까. 비록 집에서는 아내한테는 꼼짝 못하지만.(웃음)

△김〓정치계로부터 간간이 ‘러브콜’도 받았지만, 극 중에서 누린 권력만으로 충분히 대리만족했어요. 뭐든지 ‘욕심이 화(禍)’인 것 같아요. 사회 모든 분야가 성장을 거듭했지만 정치수준은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에요. 국회에서 멱살잡고 싸우지 않고 좀 신사적으로 할 순 없나.

△서〓사심(私心)을 버려야 돼요. 요즘 정치 스캔들 하나 터지면 친인척이 줄줄이 잡혀들어 가잖아요. 현군(賢君)이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 그 후

△최〓또 사극 하라면 전 못할 것 같아요.(일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적어도 지금은. 최대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그런데 월드컵 때문에 쉴 시간도 없네요. 5월까지 해외 연예인 축구단과의 경기 일정이 꽉 짜여 있어요.

△김〓MBC 미니시리즈 ‘위기의 남자’에 출연할 계획이에요. 정통 멜로는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궁예의 이미지를 벗어던질 때가 된거죠.

△서〓사람이란게 참 묘하죠. 이 고생 끝나기만 기다렸는데 막상 마지막 대사를 던지는데 너무 공허한거에요. 갑자기 실업자된 기분이고. 제의는 이곳 저곳에서 들어오고 있는데 아직 결정된 건 없어요.

그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아무도 없는 동굴에라도 들어가 ‘찐하게’ 소주 한 잔 걸치며 마음껏 ‘망가지자’고 약속했다. ‘평민’의 삶을 되찾은 그들은 당분간 소박한 행복에 젖어지내게 되겠지만 더 이상 ‘태조 왕건’을 볼 수 없다는 시청자들의 아쉬움은 꽤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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