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장르창조형 개그맨 박성호

  • 입력 2001년 4월 9일 18시 37분


부부싸움의 격투장면을 중계하다 말곤 “손으로 네 번, 주먹으로 네 번, 마무리 두 번. 아, 이게 바로 히딩크 감독이 얘기했던 4―4―2전술 아니겠습니까” 하고 엉뚱하게 축구전술을 들먹이는 캐스터.
그룹 웸의 팝송 ‘Wake Me Up Before You Go―Go’의 가사 중 ‘gitterbug’를 매번 우리말 ‘출발’로 잘못 알아듣는 지휘자.
‘봉숭아학당’에서 툭하면 “선생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합니다”라며 ‘보장하라, 보장하라’를 외치는 운동권 학생.
스타 개그맨의 산실로 불리는 KBS2 <개그 콘서트>의 창단멤버지만 뒤늦게 뚝심을 발휘하고 있는 개그맨 박성호(27)의 모자이크 이미지다.
‘개그콘서트’에서 단독 코너를 가진 사람은 ‘뮤직토크’의 박성호 뿐이다.
그가 김영철과 함께 남녀간의 온갖 사건을 스포츠중계로 패러디하는 ‘몰래가중계’도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뒤늦은 성공의 비밀이 무엇일까?
그의 웃음보따리 속을 들여다봤다.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대부분 과거 인기를 끌었던 개그의 ‘리메이크’에서 나온다.

외국 노래의 발음이 우리말과 비슷한 점을 웃음 포인트로 삼는 ‘뮤직 토크’는 선배 개그맨 박세민의 트레이드마크였던 ‘팝 개그’의 리바이벌.

<개그 콘서트> 초기 그가 KBS 공채 13기 동기인 서동균과 콤비를 이뤄 선보인 ‘로보캅’코너도 과거 틴틴파이브가 한번에 펼친 필살기를 마임(서동균)과 기계음(박성호)으로 분리해 새롭게 선보인 것.

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온갖 코미디 프로그램을 비디오로 녹화하는 등 극성을 부린 그의 개그 마니아적 기질에서 비롯했다. 이 때 녹화해 놓은 비디오테이프가 지금도 20여개 남아있다. 그는 이들 비디오 테이프에 담긴 <청춘만만세> <유머1번지> <일요일밤의 대행진> 등의 클래식 코미디를 반복해 보면서 아이디어를 가다듬는다.

“어차피 인간의 머리에서 짜낼 수 있는 아이디어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유행은 그래서 돌고 도는 것이 아니겠어요. 노래에만 리바이벌과 리메이크가 있으란 법 있나요.”(박성호)

모창모태에 강한 심현섭이 개인기형의 대표주자로 떠올랐고 표정 연기가 풍부한 김영철이 연기파로 꼽혔다면 백재현과 이병진은 순발력 있는 아이디어형으로 분류된다.

이에 비해 박성호는 끈질긴 노력파다. '뮤직토크'를 시작하기 6개월 전부터 그는 KBS 자료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가 들고 다니는 공책에는 노래 제목과 가수, 자료 번호, 우리말 대사로 가득하다. 한 주에 소개되는 노래 7곡을 위해 30∼100곡까지 들어가며 자료를 축적한다.

‘몰래가중계’는 그가 하루 한 시간 이상 인터넷에 매달려 얻어낸 아이디어를 변형시킨 것. 인터넷에 유머로 올라 있는 ‘아줌마’들의 지하철 자리 다툼을 남녀 관계에 응용했다. 또 축구중계로 유명한 송재익 아나운서의 표현을 새로 접목, ‘아, 식혜의 밥 알갱이가 가라앉듯 분위기 침몰하네요’를 유행어로 재탄생시켰다.

그런 그의 좌우명은 ‘주머니에 있는 송곳은 언제가 뚫고 나온다’(낭중지추·囊中之錐). 한편 ‘칼을 갈고 있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는 그가 후배들의 대본에 자주 써주는 글귀다.

<개그콘서트>의 양기선PD는 그런 그에 대해 “모태모창에 뛰어난 다른 개그맨과 달리 개그의 장르 자체를 개발해낸다”며 “밑천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개그맨”이라고 칭찬했다.

그의 개그는 타고난 애드립보다는 예민한 감각과 철저한 준비의 산물이다. 개인기로 승부를 거는 <서세원 쇼>의 토크박스에서 그가 제조사별로 휴대전화의 진동소리 차이를 이용해 선보인 기발한 개그도 날카로운 관찰력의 성과.

그런 센스와 관찰력은 그가 서양화를 전공한 미학도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청주대 서양화과에 재학 중인 그는 94년 충북 미술대전에서 서양화부문 특선을 수상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그림솜씨를 지녔다.

개그계의 소문난 화가인 선배 이병진, KBS 공채시험 때 짝꿍이자 학교 선배인 임혁필과 함께 셋이서 카툰 작품을 모아 올 가을 단행본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런 예술가적 기질 때문일까. 그는 방송에서의 깔끔한 인상과는 달리 씻기를 싫어하고 몇날 며칠 똑같은 옷을 입을 정도로 옷차림에 무신경해 별명이 ‘거지’다.

머리띠를 하고 다니는 이유도 멋보다는 머리를 감지 않고 다녀도 단정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괴짜답게 말한다. 그의 꿈도 역시 예술가적이다.

“자기 노래는 물론 다른 가수에게도 알맞은 노래를 작곡해주는 싱어송 라이터처럼 동료 개그맨들에게 어울리는 개그를 개발해주는 개그맨이 되고 싶습니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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