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설/영화]'반칙왕'/신인레슬러 세상을 팽개치다

  • 입력 2000년 2월 3일 10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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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왕’은 아마 ‘주유소 습격사건’ 이후 가장 재미있는 한국영화일 것 같다. ‘주유소 습격사건’을 보며 웃다가 유머의 폭력성 때문에 찜찜한 느낌을 가졌던 관객도 ‘반칙왕’에서는 거리낌없이 폭소를 터뜨릴 수 있다. ‘반칙왕’은 재미있는 코미디이면서도 평범한 소시민들에 대한 짙은 연민을 바탕에 깐, 가슴 찡한 영화이기도 하다.

상사의 구박에 시달리던 무능한 은행원 대호(송강호 분)는 레슬링을 배우면서 삶의 활기를 되찾고, 체육관 관장(장항선)은 열의 넘치는 그를 반칙 선수로 키워나간다. ‘쉬리’에서 연기가 어색했던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 ‘물 만난 물고기’ 같다. 대호가 태백산(박상면)에게 레슬링을 배우는 장면, 온갖 반칙술을 이용한 대호의 레슬링 데뷔전 등은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대호의 반칙 레슬링과 은행에서 편법대출을 막으려는 대식(정웅인)의 에피소드를 대비시키며 링 위의 반칙과 세상의 반칙 중 무엇이 더 불공정한지를 묻는 은근한 풍자도 빛난다.

‘조용한 가족’(1998년)에서 ‘코믹잔혹극’이라는 신개념을 선보였던 김지운 감독은 ‘반칙왕’에서 칸과 칸 사이의 생략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만화적 표현기법을 영화에 뒤섞는 실험을 시도한 듯하다. 불량배가 배경 벽화와 똑같은 포즈로 멈춰서는 장면, 레슬링 선수가 ‘꽈당’ 쓰러지고 난 뒤 상대방의 쭉 뻗은 다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 등에서 액션의 갑작스러운 정지를 통해 재치있는 유머를 구사했다. 초고속 카메라를 이용해 레슬링을 발레처럼 촬영한 기술도 돋보인다.

영화는 대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출근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대호는 레슬링의 승리자도, 패배자도 아니다. 다만 레슬링을 통해 세상을 살아갈 작은 용기 하나를 얻게 되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집과 체육관 등 거의 모든 배경이 프로 레슬링의 전성기인 70년대를 연상시킨다. 화면에 물씬한 ‘촌스러움’에 대한 향수는 실수투성이면서도 인간적인 것들을 옹호하는 이 영화의 주조(主調)와 잘 어울린다. 12세 이상 관람가. 4일 개봉.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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