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거친 사람이라도 돈 빌린 사람 앞에선 고분고분해진다

  • 주간동아
  • 입력 2026년 5월 31일 08시 06분


[돈의 심리] 금전 외에 마음의 빚 생겨… 피하거나 심지어 미워하기도

돈을 빌린 사람은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돈 외에도 마음의 빚이 생긴다. GETTYIMAGES
돈을 빌린 사람은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돈 외에도 마음의 빚이 생긴다. GETTYIMAGES
대학원생 시절 이야기다. 당시 친한 친구와 같이 홍콩에 갔다. 나는 학생이었고, 그 애는 아직 직장이 없었다. 서로 돈이 부족했기에 아끼면서 여행했다. 그 친구와 나는 굉장히 오랫동안 같이 지낸 사이라 서로 잘 맞았고, 함께 여행을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정을 같이하다 보니 계속해서 부딪쳤다. 하루 몇 시간 같이 있는 것과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건 완전히 달랐다. 같이 놀기만 할 때는 알지 못했던 면들이 튀어나오면서 우리 둘은 계속 다투었다. 특별한 이유로 부딪친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거리니 걸어가자, 아니다 다리가 아프니 택시를 타자 하는 문제부터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등 사소한 것들에서 계속 부딪쳤다. 그냥 각자 다니는 게 낫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돈 없어지자 달라진 친구의 태도
하루 여정으로 마카오를 갔을 때도 의견이 갈렸다. 나는 마카오 시내를 보고 카지노를 들르기를 원했다. 하지만 친구는 바로 카지노로 가길 원했다. 그동안은 서로 부딪쳐도 어쨌든 같이 움직였지만, 이제는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나는 마카오 시내를 갔고, 친구는 카지노로 갔다. 몇 시간 후 카지노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카오 시내 관광지를 다 돌아보고 리스보아 카지노로 갔을 때였다. 친구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사이 친구는 카지노에서 돈을 다 잃었다. 가지고 있는 여행비를 모두 잃었고, 심지어 홍콩으로 돌아갈 배 요금도 없었다.

이때부터 내가 돈을 다 내게 됐다. 그런데 이 일 이후 우리 둘 사이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 전에는 무엇을 하든 계속해서 의견이 부딪쳤다. 그런데 내가 돈을 다 지불하게 되면서 의견 충돌이 사라졌다. 모든 게 내가 결정하는 대로, 내가 하자는 대로였다. 수중에 돈이 없다고 해서 취향이나 선호가 달라질 리는 없다. 하지만 그걸 내세우지는 않게 됐다. 이후 여행은 굉장히 편해졌다.

이때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돈을 내는 사람과 돈을 받는 사람 간 관계,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다. 채권자와 채무자는 서로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단순히 돈을 빌려주고 갚는 관계를 넘어서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당당하기 어렵다. 돈을 빌린 사람은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돈 외에도 뭔가 마음의 빚이 있다. 돈을 빌린 게 아니라 그냥 받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돈을 받는 사람은 돈을 주는 사람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간다.

중국 작가 위화의 소설 ‘형제’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주인공 이광두는 동네 주민들로부터 투자받아 사업을 벌였다. 기운차게 사업을 시작했지만, 주문을 따내지 못해 결국 사업을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한 채 망한다. 이광두에게 투자한 사람들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투자금을 날렸다. 투자자들은 거리에서 이광두를 보기만 하면 욕을 하고 때리고 그랬다. 그래도 이광두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냥 때리는 대로 맞기만 했다.

조 시인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이전에 이광두에게 크게 맞았고, 그 후로 이광두를 피해 다녔다. 그런데 이광두가 사업에 실패한 후 완전히 기운을 잃은 채, 길거리에서 투자자들에게 맞고 다닌다. 이광두가 이제는 힘이 없다고 판단한 조 시인은 이광두에게 과거 일을 복수하려고 덤벼든다. 하지만 조 시인은 이광두에게 이전보다 더 맞는다. 그러면서 이광두가 이런 말을 한다.

“이 몸이 그 양반들한테 맞으면서도 손을 쓰지 않는 것은 내가 그 양반들 돈을 날려버렸기 때문이지. 이 몸께서는 네놈 돈을 날린 적이 없으니 네 놈을 패 죽여버리겠다.”

이광두는 이처럼 뻔뻔하고 욕심이 많으며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기에게 투자해돈을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얌전하고 수동적으로 굴었다. 돈 때문에 사람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가운데)가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협상 타결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오른쪽은 미셸 캉드쉬 IMF 총재. 동아DB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가운데)가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협상 타결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오른쪽은 미셸 캉드쉬 IMF 총재. 동아DB
채권자에 대한 부담은 국가도 마찬가지
돈을 준 사람, 채권자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건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해 여러 국제기구가 이런저런 충고를 한다. 하지만 정부가 국제기구 말을 따라 정책 결정을 하는 건 아니다. 다른 나라나 국제기구들이 한국에 대해 뭐라 하는 건 그냥 단순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이건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이 국제기구 말을 온전히 수용한 적이 있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때다. 당시 국가 부도 사태에 이르자 IMF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경제정책이 결정됐다. 그들의 말을 따르면 국내 여러 기업이 망해 나가고 실업률이 급증하게 돼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굉장히 어려운 시기가 닥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IMF의 요구를 모두 다 수용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IMF는 한국에 돈을 빌려줬기 때문이다. 국가 부도가 나지 않도록 막대한 돈을 빌려준 채권자였다. 한국은 동맹국이자 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말도 잘 듣지 않는다. 그런데 채권자인 IMF의 요구에는 별 저항도 하지 않은 채, 그 요구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도 않고 모두 다 수용했다. 그게 돈의 힘이다. 약소국은 강대국 앞에서 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채무국은 채권국에 저항하기 힘들다.

돈을 빌린 사람이 빌려준 사람 앞에서 한 수 접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반응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채권자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돈을 갚지 못하면서 빌려준 사람을 계속 만나는 일은 굉장히 껄끄럽다. 만날 때마다 돈을 빌려준 사람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자기 모습도 한심하다. 그래서 돈을 빌려준 사람을 피하게 된다.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돈을 빌려주면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돈을 빌린 사람이 사라지는 이유는 본인도 자기에게 문제가 있고, 떳떳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항상 마음이 무겁다. 그런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예 돈 빌려준 사람을 만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피할 수 없어 계속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친구, 친척이라면 피하면서 안 보고 살 수 있는데, 업무상 관계 등으로 얽혀 있다면 피하기 어렵다. 사람은 자기 마음이 불편한 일을 회피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사람의 마음은 자기 방어를 위해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돈을 빌려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나쁜 놈이고, 문제가 있는 놈이다. 돈을 빌리고 안 갚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빌려주고 돈을 갚으라고 하는 상대가 나쁜 놈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 노파에게 계속 돈을 빌린다. 그러다가 라스콜니코프는 돈을 빌려준 할머니를 탐욕스럽고 나쁜 인간이라 보고,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 돈을 빌려준 사람을 결국 미워하게 되는 건 채무자 사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자기가 나쁜 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쁜 놈이 돼야 한다.

소설 ‘죄와 벌’을 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소설 ‘죄와 벌’을 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돈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완전히 몸을 굽히든, 그를 피하든, 아니면 싫어하게 되든 돈을 빌린 사람이 빌려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어떤 방향으로든 달라지는 건 분명하다. 돈에 따라 사람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게 가장 좋다고 본다. 돈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사람에 대한 호오가 영향을 받는다면, 정말 돈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닌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한다”는 말은 돈에 따라서 마음이 바뀌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돈, 특히 빌린 돈은 사람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마음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도 달라지게 한다. 스스로 돈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돈을 빌리지 않아야 한다. 아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돈을 빌리지 않는 게 아니라, 돈을 빌리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돈에 휘둘리지 않는 한 가지 방안이 될 것이다.

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541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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