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마다 반복되는 ‘복붙’ 답변서[세종팀의 정책워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19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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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질문에 답변하는 송미령 후보자. 뉴시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답변서 ‘복붙’(복사해 붙여넣기)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송 후보자가 국회 측 질의 중 일부에 대해 과거 정황근 장관이 후보자 시절 제출했던 답변 내용을 동일하게 작성해 제출한 건데요. 쉼표 위치나 띄어쓰기까지 같아 예전 답변을 그대로 복사해 붙여넣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특히 ‘복붙’이 의심되는 대목이 ‘농정에 대한 후보자의 철학과 소신’을 답한 부분이란 점이 아쉽습니다. 나라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는 중앙행정기관장이라면 농업 정책 방향을 묻는 질문에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진솔하게 답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청문회 답변을 그대로 복사해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에 제출한 건 책임있는 태도로 보이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청문회 ‘복붙’ 답변 논란
청문회 서면 답변에 ‘복붙’이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20년 노정희 당시 중앙선관위원장 후보자는 청문회 서면 질의 답변 320건 중 63건을 베껴 제출했습니다. 앞서 청문회를 했던 조성대 선관위원의 답변과 내용이 같았던 건데요. 2018년 합참의장에 임명된 박한기 후보자도 89건 중 54건을 정경두 전 국방부 장관이 후보자일 때 냈던 답변을 그대로 제출했습니다.

한 번만 일어나도 이상할 일이 왜 여러 차례 반복되는 걸까요?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준비를 도운 경험이 있는 한 공무원에게 배경을 들어봤습니다.

“국회에서 인사청문회 질의를 종합해 보내오면 청문 준비단에서 답변을 준비해 제출하는데, 짧으면 하루이틀 안에 수백 개 질문에 답변을 모두 작성해 보내야 합니다. 후보자가 직접 답변서를 전부 작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부처 내 담당자들이 작성해 후보자가 검토한 뒤 (국회에) 제출하게 됩니다”(중앙부처 공무원 A 씨)

A 씨의 설명과 상황을 종합하면 현행 방식은 의원들의 청문회 질의에 후보자가 답을 한다기보다는, 부처 내 담당 공무원이 대신 답을 하고 후보자는 검토만 한다는 건데요. 여러 부처가 이 같은 방식으로 청문회에 응하고 있다면 ‘복붙’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이유도 이해가 갑니다. 시간은 촉박하고 답변할 분량은 많으니 과거에 이미 나왔던 답변을 그대로 쓰는 일이 있다는 거죠. 이번에 송 후보자가 제출한 답변서도 분량이 A4 용지 1100 페이지를 넘어갑니다. 물론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제출한 데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요.

정황근 장관이 지난해 제출한 답변(왼쪽)과 송미령 후보자 제출 답변. 안호영 의원실 제공.
정황근 장관이 지난해 제출한 답변(왼쪽)과 송미령 후보자 제출 답변. 안호영 의원실 제공.


‘복붙’한 후보자에 “관료에 휘둘리지 말라”?
이 같은 ‘대리 답변’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국회의원들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기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8일 송 후보자 청문회에서 “이거 장관님을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이거 누가 만든 거예요? 장관님이 만든 것 아니죠?”라고 물었습니다. 또 “장관님을 무시하는 것 아닙니까? 이거 잘못한 사람들 어떻게 할 거예요. 바짝 정신차려야 해요. 관료들이 말을 안 들어요. 관료들에게 휘둘리면 끝도 없어요”라고도 말했습니다.

어 의원의 지적은 답변을 제출한 장관 후보자보다 ‘복붙’을 실행한 관료를 더 질타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소병훈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장은 “농식품부 장관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정부의 장관 청문 준비단의 무성의다.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송 후보자를 옹호하는 듯한 말도 했습니다.

‘복붙’ 답변을 제출한 사람은 후보자인데, ‘관료에게 휘둘리지 말라’는 조언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현재 한국의 인사청문회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더더욱 그렇습니다. 수백 개 질문을 쏟아놓고 하루이틀 안에 답변을 모두 작성하도록 하는 현행 시스템에선, 후보자가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정리해 제출하기보단 부처 공무원들의 도움에 의지해야 합니다. 소 위원장의 말처럼 이건 농식품부만의 문제가 아니죠.

조응형 기자
조응형 기자


국민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부처 공무원이 대신 쓴 것보단 후보자가 직접 작성한 답을 듣고 싶어 할 겁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붙’ 논란은 언제든 또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일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실망과 불신부터 주는 일은 이제 없어야겠습니다.

세종=조응형 기자 yesbr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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