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의미는 관객의 감정과 기억 속에 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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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하고 비현실적 세계 그리는 김보민 작가
관계로부터 파생된 감정과 기억을 캔버스로
불변과 가변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한 새로운 시도와 모색

자신의 작품 ‘Stop Hate Start Love’ 앞에 선 김보민 작가. 홍태식 프리랜서
자신의 작품 ‘Stop Hate Start Love’ 앞에 선 김보민 작가. 홍태식 프리랜서
반듯한 면을 가득 채운 선명하고도 쨍한 컬러에 먼저 매료된다. 홀린 듯한 발자국에 다가가면 작은 개체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정형화된 캔버스를 벗어나 대범한 화면 구성을 선보이는 김보민(38) 작가의 작품에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과 동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지만 서로 무관심해 보인다. 마치 또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각자의 행위에만 집중하고 있다.

개체들은 화면을 압도하는 큰 면 위에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이를 발견하면 그림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대체 이게 뭔지 묻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궁금증이 솟구치는 것이다.

김보민 작가는 보는 이가 궁금해하며 스스로 의미를 추측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 ‘비워지면 차오르고, 다시 비워내는 끝없이’ ‘불필요한 그리움’ 등 제목 역시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관객들에게 열린 해석의 여지를 주기 위함이다.

지난달에는 ‘납작한 풍경’이라는 주제로 개체를 모두 배제한, 오직 선과 면으로만 이뤄진 추상화 전시를 진행했다. 그동안은 캔버스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는 비워낸 텅 빈 공간이 주는 몰입감과 차분함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탄탄한 포트폴리오를 쌓고 있는 김보민 작가를 만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순간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시간과 순간’, 53x45.5cm, 2022.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순간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시간과 순간’, 53x45.5cm, 2022.
미용학과를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원래 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였어요. 관련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미용학과에 입학했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죠. 졸업 후 좀 더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자 메이크업 전문가들이 낸 책을 구입해 학력 부분을 읽어보는데 대부분이 서양화, 회화 등 색과 관련된 미술대학 출신인 거예요. 너무 놀랐어요. 당시에는 테크닉과 현장 경험에만 집중했지 컬러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거든요. 가장 중요한 걸 놓칠 뻔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죠. ‘이들처럼 되려면 미술학과에 가서 색 공부를 깊이 있게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에 미술학원에 등록해 다시 입시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2009년 숙명여대 서양화과에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미술을 본업으로 삼은 계기가 있다면요.

“미술을 계속해도 될 것 같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졌어요. 항상 누군가가 내 작업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해줬으면 했거든요. 평생 그림을 그리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현실은 냉혹하잖아요. 교수님의 한마디에 그동안의 의심과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내렸죠. 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2013년에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했고요.

대부분의 작품은 반듯한 면 위에 사람, 동물, 식물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했어요.

불변과 가변이 모두 존재하는 이질감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반듯한 면은 공간을 의미해요. 비현실적이면서 고정적인, 영원함을 표현하죠. 반면 그림 속 개체들은 유동적이고 생명력 있게 표현하기 위해 좀 더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스스로 느낀 애정도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여기저기 흩어서 배치하고요.

면과 개체의 크기 대비도 확실해요.

면을 크게 그리는 이유는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예요. 사방으로 크게 이어지는 면을 통해 관객들이 캔버스 밖의 또 다른 공간을 상상해보길 바라거든요. 반면에 개체들은 멀리서 잘 안 보일 정도로 작게 그립니다. 관객이 작품 속 개체들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관객의 심리와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작품 세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체에대한 감정과 기억을 담은 작품. ‘썼다 지운 말들’, 72.7X 90.9cm, 2022(왼쪽). ‘눈 뜨면 잊는 꿈’, 91x116.8cm, 2022.  홍태식 프리랜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체에대한 감정과 기억을 담은 작품. ‘썼다 지운 말들’, 72.7X 90.9cm, 2022(왼쪽). ‘눈 뜨면 잊는 꿈’, 91x116.8cm, 2022. 홍태식 프리랜서
꾸준히 다루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관계와 감정, 기억이요. 여러 형태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감정과 기억들을 다루고 있어요. 작업 초반에는 사람 관계에 집중했었어요. 좋았던 사이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상대방과 내가 생각하는 애정도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럴 때마다 너무 슬프고 허무하더라고요. 이런 감정과 기억을 작품으로 남겨놓고 싶었죠. 작업하다 보니 ‘관계’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사물, 동물, 식물, 공간 등도 비슷한 관계였죠. 애착했던 사물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금세 마음이 식고, 평소 관심 없었던 공간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애정도가 변하는 것처럼요. ‘관계’로 묶을 수 있는 개체와 그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감정과 기억은 생각보다 풍부하고 흥미로워요.

작품 속 사람, 동물들은 얼굴을 숨기고 있어요. 의도한 건가요.

맞아요. 개체들은 거의 뒤돌아보고 있어요. 옆모습이어도 얼굴은 알아볼 수 없죠. 관객의 심리나 경험, 순간의 감정에 따라 앞모습이 바뀌었으면 하거든요.

개체들은 각자의 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느낌이에요.

작품을 구성하는 사람, 동물, 식물 등은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온 것이에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 공간에 반팔 옷을 입은 사람과 털옷을 입은 강아지가 존재해요. 계절과 시간, 장소를 배제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거죠. 개체들은 각각 하나의 섬이나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섬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오가죠. 그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와 교류를 맺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너머의너머’, 변형캔버스, 60x50cm, 2019.
‘너머의너머’, 변형캔버스, 60x50cm, 2019.
실제 존재하는 사람을 그리나요.

버스를 기다리거나, 걷고 있거나, 핸드폰을 보는 등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놔요. 작품을 구상할 때 사진을 꺼내 주제와 어울릴 만한 것을 선택한 뒤 가위로 오려 캔버스 위에 올려놓아요. 생각했던 구도가 나올 때까지 사진을 여기저기 옮겨가며 자리를 정합니다. 가끔 주위에서 작품에 참고하라며 뒷모습 사진을 보내주기도 해요. SNS에 뒷모습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요.

제목이 마치 한 편의 시 같아요.

제목은 작업할 때 가장 공들이는 부분입니다. 그림 그리면서 했던 생각이나 고민, 짬짬이 읽은 시집에서 영감받은 글귀를 메모장에 기록해놓아요. 작업을 모두 끝낸 뒤 메모장을 펼치고 제목을 짓죠. 제목에는 작품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요. 하지만 그 감정을 명확하게 한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하긴 어려워요. 또 제목이 간결하고 정확하면 관객이 그 감정에만 갇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함축적이고 모호한 제목을 통해 작품 속 의미를 유추하고, 자신의 감정과 연결해 그림을 재해석해보길 바라요.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무엇을 얻었으면 하나요.

다정한 시선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개체를 작게 그리는 이유는 가까이서 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주변에 섬세하고 소중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거든요. 작품 속 개체를 대하는 시선처럼 실제 사람이나 사물 등도 자세히, 다정하게 바라본다면 삶이 더욱 따뜻하고 즐겁지 않을까요.

정세영 기자 sy28230@donga.com
#2023 trend watch#김보민 작가#감정과 기억#관계#불변과 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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